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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akami 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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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똥에 사상이 있다고 생각하니?" 하고 내가 물었다.
"사상? 똥에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옛날부터 사상범은 일단 헌병이나 고등경찰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았어. 사상이 없는 범죄는 그냥 감옥에 처넣어버리지. 거기에 똥 아니냐? 더럽기도 하고, 사상과는 도저히 인연이 없잖아.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아."
잠깐만요, 하고 나카무라는 계단 중간에서 멈추어 섰다.
"똥을 싸라고 한 사람은 겐 선배입니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카무라는 그렇게 말했다.
"똥을 싸라 한다고 똥을 싸는 고등학생이 세상에 어디 있니. 농담을 정말로 들으면 어떡해."

 

 

 

자신을 겐이라 불러달라는 야자키를 둘러싸고 나가사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조용한 도시에서 페스티발을 크게 벌이길 꿈꾸고 사람들을 모은다.

 

 웃기면서도 흥미로운 건 겐이 운동권을 가장 싫어하면서도 결국 그들을 많이 인식하면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서 공격당할 위험에 처해 있어도 결코 말을 조심할 줄 모르던 녀석이 기꺼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바리케이드 봉쇄를 성공시킨다. 비록 이후에는 절대 운동권에 깊이 가담할 의사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지만, 이후에도 운동권에 있었던 이들과의 관계를 근절시키지는 않는다.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그도 운동권에서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좋아하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걸 은근 즐긴 게 아닐까 생각된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문구를 쓸 때 쾌감을 느낀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침울한 분위기를 결코 반기지 않을 뿐이다. 결국 새로 사귄 친구는 너무 진지하고 예의가 어쩌고 하는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잘 안 되고, 이전부터 친했던 친구는 갑자기 열등감에 대한 자기방어로 자기비하를 택하는 바람에 잘 안 된다. 당시 정말 좋아하던 여자친구는 겐을 요절한 어느 시인으로 비유하고 다른 남자에게 떠나버린다. 68혁명과 신좌파들 그리고 그 당시 도쿄대를 가지 못한 몇몇 일반인들의 육체적 정신적 '희생'으로 인해 일본의 문화와 애니메이션은 발달했다. 작가 무라카미 류는 언제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돌아봤지만 결코 그에 의해 정신이 함몰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여유롭게 성적 농담을 흘린다. 나는 그의 그런 정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편인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사람을 볼 수가 없다는 희소성 측면이 크다. 최근엔 그런 식의 허울을 쓴 사람을 만나서 실망감만 커졌다. 뭐랄까, 자신감이 딸린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 겐이 아다마를 공격하는 방식대로 출신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어떤 사람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건 건드리지 않는 게 진정한 예의다. 하지만 현실이 우울하다면 가급적 그 현실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도서실에서 공상적인 책을 빌려보며 현실도피나 할 게 아니라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투라도 벌여야 한다. 작가가 선택한 삶은 아무리 좋게 봐도 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라카미 류에 열광하는 우리나라 운동권 분들을 보면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든다. 어쨌던 운동권에서 '즐거운 운동'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 어느 부잣집에서 귀한 자식으로 자랐을 가능성이 크더라. 어떤 사람에게는 투쟁이 잘 먹고 잘 사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결국 즐겁지 않다고 해서 기존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으로 옮긴다 해도 계속 호구 취급 받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애초 먼치킨 직장에 들어갔으면 그런 투쟁에 말려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지며 정치에 대해 알아가는 도련님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이 무슨 똥을 싸던 난 상관없는데 제발 다자연애만은 -_-... 운동하러 왔는지 싸고 싶은 욕구에 싸러 왔는지. 그동안 운동권에서 만나 동거했는데 알고보니 남자가 유부남이었다는 케이스도 봤고, 꼰대오빠에게 몸도 마음도 다 바치는 호구동생도 숱하게 봐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려 무라카미 류가 이 시대에 대한 자소설을 쓰는 걸 보면 그 시절에도 그런 난리는 흔하게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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