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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이시카와 타쿠보쿠 시선

코코아 한 잔 중에서

끝없는 논쟁 후의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을 홀짝이며
혀 끝에 닿는 그 씁쓸한 맛깔로,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이시카와 타쿠보쿠는 굉장한 순정파로 유명하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사랑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첫 시집으로 써서 내고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기까지.

 

 비록 가난한 생활에 질려 아내가 첫째 아이를 안고 도망갔다지만, 이시카와 타쿠보쿠가 죽고 나서 겨우 1년만에 죽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헤어진 이후에도 남은 아내에 대한 좋은 감정을 청년의 고난과 함께 시로 써낸 것도 인상깊다. 사회주의자의 시선으로 본 일상생활이란 느낌이랄까. 비록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스트라이크를 했던 걸 후회하기도 했지만 혁명만 줄창 부르짖던 시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유연하게 다듬어지는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성장소설을 보는 느낌이랄까.

 브나로드 운동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봐서 순간 이게 어떤 건지 한참동안 생각했다. 단어상 해석으로는 민중들의 생활 속에 섞이는 걸 의미하지만 계몽주의와 합쳐져 민중들을 교육시키는 걸 의미하게 되었다. 좀 심한 말이긴 해도, 한 학교의 교장을 쫓아낸 건 사실상 굉장한 일이지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못한 건 시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브나로드하면 교육으로 생각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상록수라는 소설이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올랐다.

 확실히 한국의 시점에서 보기에 한국인의 어려움을 보는 그의 시점은 약하기만 하다. 한국의 시점에서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은 태생부터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이다. 가난하다고 왕따당하고 천시받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똑같이 보통 일본인들에게 왕따당하는 한국인과 비슷하다고 볼지도 모르겠다. 아니, 보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인들도 그를 보통 일본인으로 여기며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이토라도 되서, 총을 맞고 죽는 극단적인 방식으로라도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건 밑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감정이 있을 때 행할 수 있는 일이다. 오죽 외로웠으면 당시 식민지 나라였던 한국에게 기대고 싶었을까 싶다. 한국인을 테러리스트로 직시한 그처럼, 우리도 그를 일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시카와 타쿠보쿠로서 본다면, 우리는 시집 안에서라도 그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왕따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스트라이크란 무엇인가. 나도 이 말이 뜻하는 게 시위 정도로만 알았지 정확한 뜻은 몰랐다. 동맹 휴교 혹은 동맹 파업이라고 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주요 업무인 농사의 모임이었던 두레가 깨지고,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즉시 자본주의의 흐름에 휩쓸려 개개인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학교나 직장에서 불만이 있을 경우 일개 청년이 사람들을 모으고, 공부나 일을 때려치는 게 가능했다. 이 얼마나 쉽게 교사나 사장을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이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트라이크를 스트라이크라 부르지 않고 폭동이나 빨치산 짓이라고 여기며, 끔찍한 폭력으로 이를 저지하려 들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 단어를 배우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브나로드 이상의 단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심지어 문학을 접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브나로드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꼭 그런 '꼴'이 되서야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게 찌질한 남자의 매력이라고 본다. 아버지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의존하려 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자신에게 화낼 기운도 없는 아버지를 안타까이 쳐다보며 어머니에게도 애정을 담은 시를 써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담고 있으니 '한번은 꼭 만나자' 이야기할 때 시인이 장담하듯이 시인의 아내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찌질한 남자는 그렇게 찌질한 자신의 이야기를 한없이 되풀이해 써나갔고 그의 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자신의 과거를 불쌍히 여김으로서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도 부르주아적 시스템을 미워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과 다른 길을 가는 걸 안타까워하고 외로워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