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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해변의 묘지

잃어버린 포도주 중에서

어느 날인가 나는 대양에
(허나 어느 하늘 아래선지 모르겠다)
던졌다, 허무에 진상하듯,
귀중한 포도주 몇 방울을.

누가 너의 유실을 원했는가, 오 달콤한 술이여?
내 필시 점쟁이의 말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술을 따를 때 피를 생각하는
내 마음의 시름을 쫓았던가?

 

 

 

 

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불명확하게 사실을 전달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에서도 그러하듯이, 한번 가상세계의 글을 잡으면 우리는 제법 그 흐름에 우리의 의식의 대부분을 던져넣는 편이다. VR같은 영상은 육체에 상당한 피로를 느끼게 하지만 오감이 동시에, 비교적 신속하게 그 세계에 빨려들어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은 작가의 마음대로 독자가 그 세계에 빨려들어가는 걸 늦출 수 있다. 지금이야 삽화를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해당되지 않지만 일부러 등장인물의 묘사를 최대한 줄여 독자들이 스스로 다양한 팬아트를 그리게 한 판타지작가도 있었다. 만일 그게 작가의 무신경함이나 불친절이 아니라, 최대한 의식을 집중한 끝에 이룩한 절제의 극치라면? 최근 그런 기법을 사용한 소설은 오와리모노가타리(특히 오우기) 정도겠다.

 

 

 

이 시인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시 자체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물론 인물과 배경을 따로 떨어뜨려 가면서 서서히 묘사하는 시들도 많지만(특히 여자가 많다.), 자신에 대한 프로필이라던가 시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같은 상황을 상정하여 시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왠지 그런 시들이 훨씬 끌렸다. 시로 철학적 성찰을 했다고나 할까. 자신을 시의 젖을 빠는 아기라거나 자신을 너무 사랑해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 순수 이성만 생각하는 기계장치에 비유하면서도 그에 대한 긍지를 표현해낸 점 또한 독특했다. 보통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번역되는 해변의 묘지 시 부분을 그렇게 단순히 번역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번역가가 단어 하나하나에 관하여 깊은 생각을 해서 번역해나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