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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유나이티드항공 여승무원들은 대개 체구가 큰 아주머니들이었다. 칙칙한 남색 유니폼을 입고 기내를 휘젓고 다니며 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엄한 표정으로 승객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그녀들은 마치 그 옛날 버스 차장이나 학생주임 선생님 같아 보였다. 사실 나는 언제나 이런 여자들을 동경해왔다.
내게 일하는 여자를 떠올릴 때의 이미지란 잘 빠진 슈트에 하이힐을 신고 당당하게 도심을 활보하는 소위 '커리어 우먼'들이 아니라, 구식 유니폼에 투박한 구두를 신고 전차의 차장으로 일하는(꼭 전차의 차장일 필요는 없지만) 여성 노동자들이다.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는 호락호락 넘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과 튼튼한 턱, 듬직한 체구, 절도 있는 동작, 위엄 있는 말투, 어떤 일을 하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이 좋다. 특히 남자들이 할 것 같은 일이나 고된 노동을 하는 나이 든 여자들을 흠모한다. 그래서 여자 버스 운전기사를 만날 때마다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독서모임을 두 탕 뛰다 보니 요즘 여러 책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듯하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내 근황을 읽는 책으로 알게 되는 정도니... 그러나 최근 그 짓도 관뒀다.

 

여행 에세이에서 한계가 온 것이다. 나는 매운 음식도 좋아하지 않으며, 명상은 더더욱 피하고,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일은 납치되지 않은 이상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개가 여행 에세이에 동시에 나오는 진풍경을 보면서, 근미래에 사람들이 이 책을 찬양하면서 해외여행 이야기를 할 몰골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 모임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홧김에 독서모임을 둘 다 때려쳤다. 독서모임을 관두면 사실 이 고장에서의 내 지위가 불안하다. 그래서 아예 직장도 때려쳤다.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돈을 생계로 몽땅 탕진하고 몇 년 후에는 새 직장에 취직할 것이다. 가급적이면 다른 지방으로 떠났음 좋겠다. 어차피 개발때문에 여긴 이제 시골도 아니며 모두 다 꼴 보기 싫어졌다. (내가 이렇게 성격이 개같다.) 백수 기간엔 집에 틀어박혀서 실컷 책을 읽을 것이다. 이 저자가 엄청나게 싫어하는 장 보드리야르나 김연수의 책들을 읽으며 말이다. 그러고보니 사르트르의 말을 천천히 읽는 중인데 그는 결코 고뇌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부럽다.) 여행이란 존재의 불편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사르트르를 읽는 것도 여행의 한 방식이라고 본다. 사르트르의 문장은 사람을 꽤나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니까 말이다. 왜 이 사람이 장 보드리야르의 어려운 책을 여행할 때 가져가면 안 되는지도 지적해야 할 사항인 듯 하다. 그녀는 여행을 하면서 그걸 업으로 삼다보니 그런 기분이 불편한 책조차 싫어지는 것이다. 결국 여행에 어울리는 책은 간편한 에세이일 테고 정치에 대한 글이나 사회에 대해 심층으로 다룬 글은 도태되리라. 어려운 책을 읽는 것 또한 여행이다. 트렌드코리아 2018을 읽느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에 자본론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태국으로 같이 여행갈 사람을 모은다 하면 모여드는 사람이 꽤 있을 테지만, 내가 자본론을 읽고 있고 같이 읽을 사람들을 모아 독서모임을 꾸린다 하면 백퍼 그 자리엔 나 한 명만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운치있어 좋지만. 아무튼 이번 해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미 갔던 해외여행 또 갈 생각말고 독서여행을 해보는 게 어떨까. 나같이 한 번도 해외여행 안 가본 사람이나 한 번 가보게 예정된 비용을 부어주시고 말이다. 데헷.

또한 영어는 손짓발짓으로 보충해야 하는 필요가 없다면 외국인과 대화가 필요할 때 굳이 이상한 단어 섞지 말길 바란다. 외국인 입장에선 정말 귀찮고 혼란해지기만 하는 일이다. 저자의 반성은 좋지만 여기서부터 난 이 책 별로였다.

 

 


페미니즘에 관해 충분히 이야기할 만한 글이었다. 암시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볍게 넘어가다 못해 한비야의 글만도 못한 걸 보면 여행에만 초점을 두려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내가 첩이라든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하니 가족들하고 연이 끊긴 거 같긴 한데, 끊으라지. 아니 우리나라는 사실 일부다처제였다라고 미리 광고라도 해줘야 충격을 안 먹을 거 아냐. 애 없음? 입양해. 관계가 잘 안 됨? 걍 그러고 살으세요 ㅇㅇ 왜 첩을 두는지 노이해. 이 여행에세이에 또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있다. '여행하는 여성들 아무에게나 찔러 보자는 건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남자가 꼬인다'라는 자기비하 투의 이야기를 농담으로 한다는 것이다. 농담으로 보이냐? 당신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겠지만 딱히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여성은 굉장히 길을 나서는 데 지장이 많다. 나도 지금 당장 밖에 나가기만 해도 시선을 이상한 곳으로 던지거나 추근대는 남자가 네다섯은 꼬인다. 내 얼굴이 문제가 아니다. 애 딸린 아줌마, 할머니 이런 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냥 여성이면 위험한 것이다. 페미니즘 사상과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글은 항상 이렇게 위험하다.
해외를 가본 적은 없지만 전남친이 김포 근처에 살아서 출근하는 승무원들이나 혹은 승무원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은 있다. 해외여행 갔다와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외국 승무원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더 예쁘고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면 뭐하나. 취직하면 유부남들에게 세컨드용으로 다루어지니 불쌍하고, 취직하지 못하면 그렇게 예쁜 얼굴에 똑똑한 사람들이 간절히 그 직업을 원하는데도 떨어지니 불쌍하고. 정말이지 나를 포함한 이 시대 청년들은 너무 가혹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사는 곳(관광지)에서 한정식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일련의 아줌마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세계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리조트와 쇼핑과 술에 관한 이야기로 이들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구석에 앉은 아저씨는 바로 옆에 앉아서 째려보고 있는 나를 흘깃거리며 어떻게든 그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확실히 깨끗한 리조트와 쾌적한 쇼핑은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극기형이다. 게다가 돈이 정말 소중하다. 어쩌면 정말로 이 주름살 득시글한 30대에 정말로 도쿄 비즈니스호텔에서 스트립쇼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동남아에서 땀을 흘려가며 국수를 먹고 냄새나는 방에서 머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리조트와 쇼핑을 동경하지만, 그럴 깜냥도 용기도 없어서 평생 그쪽은 기웃거리지 않은 채, 이쪽이 참된 여행이라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 꼴 보면서 이 꼴 나느니 차라리 난 아무 해외여행도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으며 해외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족들 모두 세계여행 가자 할 때
이 책을 읽던 나는
셋이서 가라고 나는 집에서 개를 돌보겠다
호텔에 냅두면 얘를 누가 잡아먹을지도
라고 하니 어머니가 날 이상한 눈초리로 보셨다


 

그나저나 궁금한 점이 있다. 해외 여행 갈 때 복대 필요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기사 세상이 점점 발전해가니.. 아니 그치만 전쟁지역이나 슬럼가도 분명히 있을텐데? 이것에 대해 좀 아시는 욜로 분들의 댓글 부탁드립니다.

 

 

한국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보았다. 바람을 피우는 남녀의 배우자들이 동병상련의 괴로움을 나누다 서로에게 끌리는 내용의 영화였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랜 후에 남자는 홀로 앙코르와트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세월에 풍화된 돌덩이에 손을 가져다댄다. (...) 살아 있는 사람들은 무희의 얼굴을 한 채로 시장에서 앙코르와트의 모형을 팔고 노점 앞에 앉아 탁탁 병아리의 머리를 깨어 먹고 어린 동생을 옆구리에 낀 채로 조잡한 물건을 팔러 다니거나 앙코르와트를 제집 삼아 논다. 가끔은 얼빠진 관광객의 가슴을 만지기도 한다.

 

 


앙코르와트는 내가 드물게 가고 싶은 해외 지역 중 하나에 속한다.

 

돌아다니기는 좀 피곤하고 앙코르와트 위에 올라가서 책을 읽거나 하늘을 보거나 자거나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친구 M과 나는 많은 곳을 함께 여행했다. 정선을, 영주를, 속초를, 태국을, 라오스를, 도쿄를, 교토를 수차례 같이 여행했다. 그 애와 나는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다.

 


내가 사는 곳을 절친과 여행했다고 누군가 말할 때의 그 오묘함. 사실 날씨만큼은 외국같은 곳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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