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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적멸에 앉다

노량진역의 폭설 중에서

비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포장마차의 행렬
(...) 밥그릇에 사정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허겁지겁 녹여 먹는 취업 준비생들
한국사, 헌법, 영어 공부에 청춘을 건
9급 공무원 수험생들
속성 단기 완성 강좌처럼
금세 한 끼 식사를 해치웁니다
미끄러운 육교를 간신히 건너
학원 건물로 사라집니다
"씨발, 천지 분간은 필요없다."
학원 입구에서
폭설을 뒤집어쓴 어떤 남학생이
하늘을 치어다보며
선언문을 읽듯 소리칩니다
하늘이 평평 내려옵니다

 


 


새로 직원이 채용되었는지 (근데 알아보니 아니더라)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문은 사라졌다. 그래도 전화가 없는 걸 보면 이제 다시는 나에게 문의 안 할 건가 보다. (이것도 아니더라)


다른 알바 하지 말라고 압박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시간협의랜다. 편의점을 갔는데 저녁 8시에 시작해서 아침 8시에 끝낸단다. 일 끝나고 집에 오면 9시다. 3시간 자고 절대 13시에 출근할 수 없는 걸 몸으론 잘 알고 있는 나이면서도 미련이 남는다. 차라리 그렇게 일해서 벌면 부모님을 고생시키지 않은 채 더 떳떳이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러나 다음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직원들이었다. 자리를 옮긴다는 소문(사실 생각해보면 자리를 옮길 때부터 내 개고생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눈 앞에 그려지기 때문에 관둔 게 80%지.) 내 눈앞에서 대놓고 책은 팔리지 않으니 내 코너를 축소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사장, 역시 대놓고 내 앞에서 서적코너 언제 문 닫느냐고, 너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수런댔던 직원들. 굶어죽게 생겼으면 다시 마트 가서 경력 들이대면서 비벼댈 지언정 다시는 이 지방에서 그 직장의 일은 하지 않으련다. 이 와중에 포항은 8시간 일하고 140만원 제대로 준다고 한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따지고보면 이래서 내가 노량진을 가면 안 됨 ㅋㅋ 술만 쳐마시고 공부 안 할게 뻔해.


 

돼지국밥이란 아무래도 서민적인 이미지가 강한 음식이다.



카뮈, 니체, 원효 이들은 모두 시대를 풍미할 사상가들이지만, 우리 가난한 서민들이 실존주의든 철학이든 해탈이든 알 바가 있을까. 그들은 우리가 어리석다고 할 수 있지만, 깨달음의 기회 없이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갈 뿐인 우리. 찬 바람이 할퀴는 가운데 흘러가는 삶을 우리는 걸어감에, 잠시 주막에 들러 돼지국밥으로 심신을 따뜻하게 달래는 것을 그 누가 욕하리요. 카뮈여, 니체여, 원효여. 토렴을 한 뜨끈한 돼지국밥을 함께 먹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국물을 들이켜자. 그저, 우리는 옆에 내 사랑하는 자식, 아내, 친구가 있음에 안분지족하면서 걸어갈 뿐이고, 지금 내 앞에는 아삭한 깍두기가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소소한 삶의 길 속 작은 것에 만족하는 우리를 욕하는 것이 오히려 돼지가 비웃을 일이 아니던가. (그리고 돼지국밥엔 소주가 있지 않나.) 전에 부산에 가서 돼지국밥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시간도 장소도 살찌는 것도 잊고 순대까지 추가해서 마구 퍼먹었었다. 여행 마치니 3키로 쪄 있더군()


 


솔직하다 못해 빨개벗은 시는 인상에 남았다.



그러나 이런 부류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여성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고리타분하다. 윤리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언제나 말하는 것이라 시에 대해서까지 이런 말을 붙이기 미안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아내를 강제로 덮치는 건 강간이다;;; 아무리 도중에 실패했다 해도, 감기가 걸려서 열이 높은 아내와 한다는 건... 그냥 과장해본 말이라 해도 발정을 억누르는 듯한 시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마광수처럼 다수의 여성이 아니라 한 여성(아내)에게만 집중하는 게 특이하다 볼 수는 있겠다. 굉장히 가족에 대해 많이 쓰는데, 단란하고 약간 과격한 가족에 대한 글은 좋지만 현대시의 흐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 때문에 간단한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기가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야한 시를 좋아할지는 의문이다.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내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는 아니듯 시의 주제가 항상 조금씩 어긋난다는 느낌이 있다. 그게 좀 아쉽다.

 

소 떼

아버지와 설악산에 갔다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면서
두루 시선을 주던 아버지, 왈,
ㅡ저 바위는 소처럼 눈을 희번덕 부라리네
ㅡ화가 잔뜩 난 것처럼 갈기를 바짝 세웠어
ㅡ제 엉덩이를 내려치는 소꼬리 같구먼
ㅡ구유통을 두 뿔로 치받는 모습이야
ㅡ긴 혀로 새끼를 핥는 모습이야
ㅡ발정난 암소가 밤새 영각을 켜는 모습이야
ㅡ정액을 질질 싸며 수소가 암소를 올라타는 모습이야
ㅡ수소 자지는 어른 팔뚝보다 더 크지, 장엄하지!
아버지의 눈에는
공룡능선, 소청봉, 귀떼기청봉, 비선대의 용솟음이
온통 장엄한 소 떼로 보이나 보다
설악산을 오르며 소 떼 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심란한 마음을 또 시가 이렇게 위로해주네요 ㅋㅋㅋ
한번도 이렇게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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