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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모항

생닭 중에서

그 저녁만 아니라면 당장 배드민턴 채를 낚아채고 싶어 제자리걸음인데
내 맘 알아챘는지 아가씨들은 셔틀콕 버려두고 손 뽀뽀를 날린다
셔틀콕은 막 끓는 물에서 꺼낸 암탉처럼 거지반 털이 뽑히었다

오오라, 닭집 달려가 내 닭털 주워 와서는 셔틀콕 만들어 주었으면
그러면 아가씨들은 삼촌, 배드민턴 쳐요, 팔짱 낄 것을

나는 못 이기는 척 어두워질 때까지 푸드득, 푸드득 날갯죽지를 적실 것이며
슬그머니 이름도 주고받을 것이며
사흘에 한 번씩 투석하느라 닭털 뽑는 짱구 형님 왕년의 전설도 풀어놓을 것이며

그러면 엄나무닭이고 배드민턴이고 다 잊고 초롱다방 병아리 같은 아가씨들과 고향이며 눈물이며 쏟기도 할 것을

 

 

다 진지하고 운동권의 슬픔이 티나는 글이며 슬프다 싶은 시 일색이면 솔직히 재미가 없다.


이미 그런 시집이 왜 좋지 않은지에 대해선 블로그에 쓴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가 더욱 돋보인다. 닭집이 이 시인에게는 일종의 힐링 장소인지 닭에 관한 이야기가 이 시 말고도 다시 한 번 더 등장한다. 시에선 저자가 어머니의 밥상인 엄나무닭을 먹으러 집으로 간다. 그러다가 배드민턴을 치는 초롱다방 아가씨들을 본다.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 여성의 모습은 건강함과 아름다움이 범벅된 절세의 풍경이 아닌가. 그 아가씨들도 그를 보고 셔틀콕을 버려둔 채 환호성을 지르고 손 뽀뽀를 날렸을 것이다. 말도 걸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남자가 귀여웠을 테니까. 수줍어진 시인은 배드민턴 채를 낚아채는 상상을 하며 엄나무닭만 아니었어도 그 사이에 끼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영락없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지만, 꾸밈이 없어 귀엽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말을 걸지 않고 시를 쓴 듯하니 더욱 좋다.

 

느린 우체통

봄비 맞으러 나갔는가
박새, 집을 비웠다

강원도 홍천군 종자산길, 박새는
이 숲의 바다를 제주왕나비처럼 날개가 해지도록 건너갔을 것이다

박새의 발자국처럼 봄비가 찍힌다

발자국 따라 바다를 떠나며
6개월 뒤에 떠난다는 우체통에 봄비 두 통을 넣었다
편지의 느린 걸음이 마음에 썩 내키진 않았다

지금 내가 항로를 벗어나진 않았는지
가을쯤 물어볼 생각이었다

돌아보니 박새의 집이 우체통을 닮았다

 


전반적으로 시들이 이런 느낌이다. 비가 왔다고 이야기하진 않는 시 조차도 왠지 날이 흐리고 추적추적 이슬비가 왔을 것 같은 느낌이다. 시인에게 무언가 큰 일이 있었구나 느껴지긴 하는데, 사회 이슈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완전히 서정시로 돌아선 듯하다. 기존의 시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운동권에 많이 참여하신다는데 메세지가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게 조금 아쉽다. 환경보호에 관한 글조차도 없었다. 그렇지만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생생한 풍경묘사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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