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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신작로를 가로지르고 선 아버지

신작로를 가로지르고 선 아버지 중에서

 

6,70년대

반공 방첩으로

사방이 빨갱이라고

간첩신고 하라고

빨강 페인트로 멋지게 갈겨 쓴

현수막,

(...)

이마가 벗겨진 대통령이 지나가고

숨 거둔 아버지의 양팔이

찢어졌다

군데군데

예수처럼 세워 둔 아버지의 분신

 

묶인 손발로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목마른 포스터,

안녕하세요

세상은 그대로이고

신작로를 가로지르던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다

 

 

어쩐지 자꾸 신작로를 '십자가'로 읽게 되는 시이다.

 

부모님에 관한 시라고 할 만큼 시집 안의 시의 주인공이 전부 부모님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역사부터 일상 생활까지 전반적으로 훑어볼 수 있는 훌륭한 시집이다. 테마가 있지만, 의식하고 쓴 게 티가 나지 않는 게 좋다. 테마라고는 했지만 시인으로서 화자의 일상 이야기라던가 인생에 관한 교훈적 시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후자라고 해서 흔한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이 글에서는 내가 이해하기 쉬웠던 시만 실었다. 나머지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스팔트 위 어머니

 

하루 온종일

천정만 바라보며 사는 엄마

그리워

하늘을 보니 하염없이 눈물 흐르네

꼭, 눈물 같은 비 오는 날

막걸리에 밀가루 반죽하여 아랫목에 묻어 놓고

당신 사랑만큼 부풀어 오르자

고명 담지 못한 공빵 건네주던

미안한 웃음 닮은 속 깊은 정,

가슴에 접어 두고 조금씩

조금씩 내어주던 아쉬운 사랑처럼

오늘은 붉은 팥 찐빵

한 입 베어 물어 하늘 보고

이슬 비추일까

고개 떨구니

생전 즐기시던 물방울무늬

검정 원피스

아스팔트 위에서

춤을 추네

 

 

그나저나 저런 걸 술빵이라고 하나? 한 번 만들어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저런 건 안에 팥소가 없어도 맛있지 않나. 심심하면 꿀을 찍어먹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옛날엔 꿀도 귀했을지 모르겠지만.

 

빈 가슴 중에서

 

공원 돌담을 끼고

굳은 표정으로 쪼그려 앉은 노인

깔끔한 행색에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행여 그 누가 들을세라 소곤대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러니까, 아들이 오라고 해야 가지"

(...)

바보처럼 내주기만 하여도

분이 넘치다 여기는 어미는

손주를 안겨 준 여자의 미래를 거울처럼 안고

저무는 노을 따라

강줄기 따라

나비 쫓는 소녀처럼 허무도 함께 날려 보낸다.

 

 

미래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지도 모르는 나로선 저런 장면 보면 무섭기만 하다 ㄷ 적당히 하고 남은 인생 자신을 위해 투자하셨으면..

 

볼트 부재 중에서

 

TV를 켤 때마다

다른 세상이 보인다

 

내가 숨 쉴 만한 곳은 어디

 

콘크리트 방죽으로 갈 길 잃은 파충류처럼

언제나 상자 안에 갇혀 숨 쉴 수 없다

 

자연의 아지트인 것 같던 그곳,

거친 육두문자가 날아다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저주를 퍼부은 게지

조잘 조잘 조잘 조잘

(...)

화면의 광기를 위해

나불대는 저

입술

 

볼트가 다 풀려 버렸다

 

 

요즘은 다들 컴퓨터나 핸드폰을 이용한다지만 아직 어르신들은 TV를 더 많이 사용하시니까.

그리고 이 책 읽어볼수록 자꾸 화자인 '부모님들'이 요양원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쉰 일곱 사내 나이에 중에서

 

바람이 슬슬 불어왔다 녹음 부르는 햇살이 깊어질수록 사내 마음은 급해졌다 벌써부터 끊긴 일감으로 식구들 쳐다보기가 면구스럽다 돈벌이는 쉬엄쉬엄 해도 괜찮다는 아내 말에도, 뜸해진 일거리로 괜스레 뒤통수가 따가워진다

 

버스정류장 앞, 꼭 원주집에 들려 한잔 걸치기 좋은 날 뒷마당에 심긴 파 한 줌으로

먹음직한 파전을 부쳐 내오는 주모 얼굴엔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당신 심정 다 안다고 천 원짜리 몇 장에도 큰 인심을 베푼다

(...) 일감 떨어져 사방 기웃대는 쉰일곱의 남자, 돌아갈 곳은 가슴으로 낳고 날아가 버린 어미 닮은 여인 웅크리고 앉아 잦은 된장국으로 기운 돋궈주는 그곳으로 돌아가 한 바가지 긁히는 게지

 

육십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쉰일곱 나이에

 

 

이렇게 시인이 사는 곳인 듯한 강원도 원주 맛집이라던가 경치 좋은 곳도 소개하는 지역시집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제발 여자한테서 자기 어머니 모습을 보지 말라고; 남한테 과하게 기대니 바가지를 긁혀도 이상하지 않지. 그리고 돋궈주는 게 아니라 돋워주는 것.. 이라고 하면 시집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발언이겠고 남자가 갑분싸하겠지? 솔로 몇 년차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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