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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뱀 잡는 여자

아득한 횃대 중에서

 

ㅡ한국에서 온 지 3개월이 되었어요

세 살짜리 딸아이에게 읽어주고 싶은데 동화를

보내줄 수 있느냐고 e메일 속에서 울먹울먹

더듬거리던 주소로 동화책을 보내주고 꽃씨를 받았었지

그리고 낯설어서 심히 미안했던 토양에 꽃씨를 찔러 넣고

도라지꽃 새파랗게 질린 빛깔로 어리둥절 피어났을 때였을까?

ㅡ어젯밤엔 아픈 딸아이를 끌어안고 밤을 꼬박 새웠어요

내 눈에도 도라지꽃 울컥울컥 피어나게 만들었던 그가

동화 읽어주는 아빠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네 꽃씨 탓이겠지 꽃씨

나눠주는 마음이라면, 아빠보다는 엄마일 거라고 믿어버린

지친 새처럼 간간이 그의 메일이 날아왔네

스시 바와 청소부, 목수 일을 하다가 스시 바로

되돌아갔다가 또다시 청소부로 전전긍긍했던

그의 이력만큼이나 힘들어 하던 도라지꽃

(...) ㅡ누님 아무래도 저는 닭 공장으로 가야 할 듯 싶습니다

 

 

나도 여자인 줄 알았다; 이런 선입견 좀 고쳐야 할텐데. 아무튼 이 아버지 대단하시다. 혹시 혼자 애를 키우시나.. 시 전반에서 웬지 그런 느낌이 나는데. 이것도 선입견이면 죄송합니다 ㅠ

시인 한혜영 씨는 윤동주 시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동주해외작가상을 이번에 수상했다. 요즘엔 재미난 비유를 대는 게 컨셉이신 모양인데,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는 평이 많다. 아무래도 이 시집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성의 어두운 과거를 기반으로 하다보니 그런 모양이다. 남자들은 사연 있는 여자를 싫어하는 모양이나, 여성들은 그 사연으로 인해 싫어도 대부분 강제로 철이 들게 된다.

자주 만나고 싶다고 서로 말하고 다니는 소설가 이인휘 씨의 오랜 지인인 모양이다. 비슷한 경험을 겪다보니 그런 것일까. 여성 화자의 분위기가 이인휘 씨가 쓴 소설 분위기랑 많이 비슷하더라고요 ㅎ..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 나락의 나날을 펼치는 느낌이다. 낭독회에서 읽어도 좋지만, 혼자 읽으면서 곱씹기에 무엇보다 제격인 시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시집은 소설같다고 요약할 수 있다. 아름다운 낭만이나 애틋한 사랑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었고, 어렵던 시절의 아픔과 주변 사람들의 억척스러운 삶이 녹아있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떠들었다는 이유로 교탁 앞으로 불려나온 두 학생이 서로 뺨을 때리는 미친 바람 이야기는 딱히 이 시가 아니더라도 학생인권을 부르짖는 사람이 없던 시절 십대들이 흔히 겪은 일이다. 따귀 때리면 인간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클리셰는 이미 일본 만화줄거리의 전통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러니 뺨을 때리는 인간이 있으면 '너 친일파지!'라고 우기면 됩니다. 내가 초딩때 그러다가 뺨 때린 인간에게 명치를 맞고 뻗긴 했지만(...)

어느 크리스마스 날 미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던 외삼촌의 소개로 어머니와 형제들이 고아인 것처럼 속인 채 장난감과 브로치, 머리핀을 받고 밥을 얻어먹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 때 먹은 음식을 쥐똥나무에 비유하면서 화자는 '내 위장 속에 오래 갇혀 있던 빵'이라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표현력은 최영미 시인과 투톱을 달리지 않을까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여류 시인이다.

 

어떤 첼리스트의 노동 중에서

 

연주자는 꽃잎을 불러 모으거나

깃털을 불러 모으는 마술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므로 음악을 감상하는 일이란

깃털로 만든 이불을 덮고 누워

꽃잎에서 추출힌 향기를 맡는 것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방금 전에서야 연주자들 역시

노동자라는 사실을 어이없이 깨달은 것이에요

탄맥을 찾아 끝도 없이 내려가는

광부라는 거, 삽 한 자루가

전 재산인 저 첼리스트를 보란 말이지요

땀 뚝뚝 흘려대며 필사적으로 놀려대는

저 삽질

어지간해서는 가슴 더워지지 않는

뭇 영혼에게 땔감 대주는 일이란 얼마나

고단하고 숨 막히는 작업인가요

 

 

난 시의 의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티스트에게 공짜로 무엇 좀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다시 군대 가서 조교 본 것도 아닌데 돈도 안 주고 삽질 한 번 해보라 하면 얼마나 화나겠어 ㅋ

아 그러고보니 러브라이브가 그래서 삽질을(아님)

만루 홈런 중에서

 

멋진 홈런입니다

상을 당한 옆집 펜스를 넘어

포물선 길게 긋는 저 새는

 

죽을 둥 살 둥 쫓아오는 외야수

낭패한 생의 얼굴을 보는 것은

통쾌할 터이지요 처음으로

마음 놓고 웃어젖히는 웃음소리가

우당탕 퉁탕! 참나무를 거쳐

양철지붕 위로 호탕하게 쏟아집니다

(...)

구부정한 척추를 펴는가 싶던 순간

깔끔하게 새를 받아버린 늙은 단풍나무

품속 깊숙이 그것을 집어넣더니

어느새 캄캄하게 저문

저쪽 세상으로 가버리고 없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야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진지한 장면을 과하지 않게 해학적으로 표현했다는 데서 높이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보는 화면

 

그리움엔 흑백영화가 제격이다 가난의 배역을 맡아 오히려 희망이던, 하늘 전면에 빗줄기가 죽죽 금을 그어대던 시절, 기도를 하던 곰보 아저씨 이마에 푸들거리는 갈매기 두어 마리도 잠깐 보이고 달빛의 수로였거나 나팔꽃 담쟁이의 영역이었거나 상관없이 개구멍치기에 전문이었던 계집애 눈동자가 백동전처럼 빛을 내어 뿜고, 사랑방 손님이 막 도착했는데 하필이면 정전...... 휙! 휙! 놀란 화면이 번쩍 눈을 떴던 그때 그 화면을 다시 보는 것이다 열두 살 이후 내 맘에 다녀갔던 사랑방 손님들을 차례로 불러들이며

 

 

ㅎㅎ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패러디인 줄 알았는데 아예 손님과 옥희의 로맨스물인데다 왠지 한둘이 아니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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