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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생각하는 구두코

하얀 손수건 중에서

 

황지영

 

하얀 손수건 속, 푸른 바다 넘실거린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 홀로 먼 바닷가로 시집 온 그녀

얼굴도 익히기 전 신랑은 저 멀리 태평양전쟁에 끌려가고

혼자 기나긴 밤을 재봉틀에 박았다

피멍을 가슴에 박고 온 남편, 밤낮을 이어 눈을 붙이지

못하고 휴일 어느 날 비행기소리에 혼비백산 황급히 동굴로 걸어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고향산천 돌아가 어미도 아비도 볼 수 없어 목으로 내려오던 식도조차 꽉 막혀

창자를 끊어내었다.

비오는 날이면 비감지기 어미생각 뼈를 고우고,

눈 오는 날이면 눈썰매를 함께 타기를 기다리는 동생 생각

강바닥에 돌을 달아 마음을 저렸다.

그녀의 치마에는 눈물 젖은 두만강 푸른 물이

출렁되고, 금강산이 아프게 수놓아져 있다.

 

 

딱히 눈썰매가 나와서는 아니지만(...) 문법 틀린 것만 빼면; 거의 황무지 시와 맞먹을 정도로 그 당시 한국의 역사를 잘 요약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집은 외할아버지가 6.25 참가하셨다가 다리 한 쪽을 잃고 오셔서 외할머니가 고생하셨다. 전쟁과 군대가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었는데, 철없는 아이들은 외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병신이라고 놀렸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전남친은 그가 장교가 아니라며 무시했다. 분위기 읽어라 좀 계급이 그리 중요했냐. 내가 그를 찬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순서가 아니었을까. 내가 보기엔 지금도 국가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답이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그렇다. 박정희 시대 때라면 이 나라에서 가장 빡센 일에 뛰어드는 산업역군들 아닌가? AI가 좋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 목숨을 함부로 다루나? 여러 생각이 나게 만드는 시이다.

인쇄 오류가 있었는지, 마선숙 시인이 쓴 낙타란 시가 첫부분부터 잘려 있었다. 대략 맥락은 알 수 있지만, 가뜩이나 적은 분량으로 최대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시집에서는 치명적인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동백꽃 바퀴타고 달렸다 중에서

 

마선숙

 

혹한 몰아친 겨울 한복판

실내의 동백이 폭탄처럼 개화했다

한파를 자양삼아 붉게 타올랐다

 

예전에 언니는 동백이 절정이면 살림과 연애하다

발칙한 소녀처럼 집을 나가 어둡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불나비에 홀리듯

 

문득

불량한 남자의 유혹처럼 지름신이 휘몰아쳐

엄마도 던지고 아내도 버리고

딸 방에 숨어들었다

 

청바지와 남방과 야구모자를 몰래 훔쳐 거리로 나왔다

선글라스 척 걸치고

 

청량리서 기차타고 반곡 간이역에 내려

휘적휘적 건들건들 걷는데 뒤에서 누가 말 붙였다

차나 한잔 할까요

 

봄처녀처럼 냉이 같은 남자 하나 꽃바구니에 담을까

고개를 돌리니 딸 친구 뻘쯤의 젊은 청년이다

 

실례했어요 나이 든 아주머니인 줄 몰랐어요

눈이 마주치자 청년은 기겁해서 뒷걸음질 쳤다

 

 

이 시집은 청미래라는 동인에서 나온 시집이다. 1년에 한 번 시집을 내는지 아님 시의 분량이 차는대로 내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책은 3번째라고 한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전단지나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동백꽃 등 지역의 특색을 어필하기도 한다. 그나저나 딸 뻘의 청년이 접근해왔었다니 한 미모하시는 듯하지만 시인은 옷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러고보니 어느 젊은 커플 유튜버가 반지 사러 돌아다니는데 매장에 들어가는대로 족족 쫓겨나서 코트를 입고 다닌다 하더라. 겉모습만으로 인물을 파악하는 건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하느님

 

신언관

 

내 생각과 다르다 해서

얼마나 더 많이 죽일까 골몰하여

뱃속의 폭탄을 터트려

나는 영원히 살고 너희들은 영원히 죽는

주님의 경전이 전파되고 있다

 

내 하느님이 너의 하느님과 다르다 해서

너의 하느님을 죽이면

내 하느님이 나를 축복하여

더 큰 영광으로 인도한다고

봉긋한 소녀의 가슴에 낙인을 찍는다

 

한 숟가락의 밥술보다 못한

입술 언저리에 뱉어지는 정의를 되뇌이며

우주의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듯

팔다리 근육이 풀어해질 때까지

생명의 수탈을 자랑한다

 

한 길도 안되어 훤히 내려다보이는

허울의 어리석음을 외면하고

미친 괴물의 흔적을 따라서

내 하느님이 가르쳐준 속임수를 앞세워

주검의 광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를 보여주어도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을 제일 가는 하느님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 점이 좀 안타깝다. 남의 감언이설이나 자신의 망상에 넘어가지 말고 스스로 옳은 길이 무엇인지 탐구하길 바란다.

 

마침표 없는 애인 있어요 중에서

 

이소율

 

사시사철

브람스 교향곡 울리는 애인 있어요

길어서 빨강 망사 커튼

사이로 숨길 수없는 애인

노랑, 파랑 타일로 모자이크 된

호텔 복도에 하이힐 발자국 소리

숨기며, 숨죽이며 밀회하는

애인 같은 거 말고요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를 타고

가슴에 꽂히는 비밀

가슴 속 사연 안개비로 뿌리는 소문

그런 거 없는 애인 있어요

페이스 북으로 날리는 문자 아니고

알타미라 벽화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런 무늬 새긴 애인 있어요

(...)

헝가리 무곡에

속마음 쏟아버리고

사시사철 운명 같은 애인 있어요

 

 

여기서 등장한 음악은 클래식이어도 꽤 시끌시끌하며 밝은 면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귀는지는 잘 모르지만 서로 솔직하며 개방적인 면에선 닮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페이스북으로 날리는 문자같은 애인이 아니란 면에선 좀 불가능하다 싶기도; 나만 해도 전남친들이 대부분 문자로 고백하거나 최소한 SNS에서 만난 사이인데, 그런 만남이 욕을 먹을 소재도 아닐테고 무엇보다 그런 매개체 없는 만남이 지금와서 가능할지; 아무튼 이 시인 말고도 다들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런지, 클래식을 소개해주는 시인이 많으니 그걸 들어가며 시를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일기

 

장우원

 

제목: 할머니

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날씨 흐림

 

테레비전에 대통령이 나왔다. 할머니는 에구 불쌍쿠마, 에구 불쌍타, 혀를 찼다. 할매 와요? 뱅기도 맘대로 타고 돈도 많쿠로 뭐가 불쌍한교? 그게 다 무신 소용이고? 부모 없이 혼자 얼매나 외롭것노? 너사 엄마 아빠 없시믄 안 불쌍컷노? 와예? 할매가 더 블쌍하지예. 할매는 엄마 아빠 있능교? 옷도 좀 보시소. 저래 좋은 옷 할맨 있능교? 그기 아니라카이. 니가 안즉 어려놔서 잘 모리는 기다. 뉴스가 끝날 때까지 할머니가 테레비를 본다. 연속극도 안 보다니. 차암 별일이다. 텔레비전 가까이 앉아 꼬부라진 할머니 등이 엄청 작아 보인다. 일기 숙제 끝.

 

 

그래도 이 분은 닥치라곤 안 하네. 우리 어머니는 일혐이신데 내가 '고종 아무것도 안 했었다니까 그러네.'라던가 '이순신 너무 좋아하면 몇몇 가문의 후손들이 전화질한다 자기네 가문 깐다고 ㅋㅋ' 이러면 바로 닥치라고 소리지르심.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갑자기 그렇게 흑화되셨는데, 내 생각엔 박근혜 불쌍하다고 읊조리실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나도 나중에 나이들면 저렇게 흑화되려나 싶은데 나보다 3살 어린 동생 놈도 갑자기 야마가 돌아(그놈은 일베사이트 볼 때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는 게 내 추측이다. 본인은 아직도 극구 아니라 하지만 그 때 내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었거든.) 그렇게 설쳐대는 걸 보면 나이탓은 아닌 듯. 내가 걔 기저귀까지 갈아줬는데 얍삽빠른 면은 있지만 폭력적인 면은 없었는데. 아무튼 난 언제부터 그렇게 되는지 알았음 좋겠다. 그 전에 죽어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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