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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단단함에 대하여

내가 모르는 나라ㅡL에게 중에서

 

여기 바람만 부는 나라가 있다.

아니, 깃발만 펄럭이는 나라가 있다.

아니, 길들이 출렁이는 나라가 있다.

(...)

여기 말들은 사랑, 혁명, 관용, 자유와 평등 같은

피를 머금은 풀꽃의 꽃말들뿐이다.

여기 사람들의 아침인사는

어색하게 손을 들거나 마주잡지 않는다.

가볍게 뺨을 어루만지고, 눈동자 깊숙이 영혼의 이면까지

읽지 못하면 이웃이 될 수 없다.

(...)

여기 삶이란 껴안고, 어루만지고, 뒹굴고, 슬며시 서로의 목을

조르고, 기쁘게 죽여줄 수, 죽어줄 수도 있는 것들뿐.

아무도 슬픔 따위로 발목을 접질리지 않는다.

여기 계절이란 사랑하거나 쓸쓸해하는 단 둘뿐,

비가 오거나 햇볕이 쨍쨍함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알몸이거나 빈 몸일 뿐

아무도 교양과 위계의 옷차림을 신경 쓰지 않는다.

 

 

패션감각 없는 저로선 꼭 가고 싶군요(...) 그 외 부스스한 머리칼이라거나 가급적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맡기고 싶다는 것도 나와 많이 비슷하다. 심지어 내가 외면하고 싶은 전투적인 면도 ㅋㅋ 그래서 되려 천천히 읽은 게 아닌가 싶다. 나를 마주한다는 건 나에겐 언제나 불편한 진실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아무튼 이것도 페친이 추천한 시인분이 쓰신 책.

제목에 어려운 한자 많아서 쫄았는데 의외로 내용은 한자가 별로 없다.

한참동안 살지 말지 고민했는데 결국 사기로 결심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티눈을 뽑으며 중에서

황사비,

흐려지는 초저녁 창가.

어둑한 모니터에 시 한 편 띄워놓고

손톱 날을 세워 발바닥 티눈을 뽑는다.

가장자리를 긁어 억지로 틈을 새기고,

벌어질수록 굳어가는 마음에

강소주 한 잔 부어주고,

창틀 두드리는 여린 빗소리에 맞춰

티눈 가장자리를 억세게 다시 긁는다.

(...) 삼 년을 괴롭혀온 발바닥 티눈 하나,

그 작은 곤란조차 쏙, 뽑아버리지 못하고

해질녘마다 절름대며 그대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새 생살 틈마다 핏빛이 스미지만

얼마나 더 벌어져야 마음은

제 뿌리의 힘을 푸는가?

기꺼이 놓아버리는가?

생살의 피가 새는 발바닥보다 먼저

빈 가슴이 화끈대는 황사비의 초저녁.

난 정말 사랑에 능통했는가?

정말 그렇게 이별에 능숙했던가?

 

 

티눈 뽑아본 적도 없고 사람들하고 헤어질 때 그렇게 사근사근하고 좋게 갈라선 적도 없다. 그래서 아싸가 된 건가(...)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떨리는 곁눈질에 슬쩍 무지개가 묻어났지만

늘 웅덩이는 어둡고 고요했다.

구름 한 점, 나뭇잎 하나 떠 있지 않았다.

영혼의 밑바닥을 비유하면서

욕망의 끝물을 은유하면서

언제나 저녁 산책은 모던에서 로만으로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며 환하게 시작되고

 

오늘을 믿지 않는 나. 작은 용기로 솔직하자면, 오늘을 살고 싶지 않은 나.

골뱅이공습,어업94억씩피해,김성환후보'작전주몰빵',14배 차익"바다"이수만이등록금전액지원해줬다"외래해충꽃매미대구도심습격,이용찬PO제외,급박했던두산의하루,유럽●러시아,1000년만의강추위온다,"양심절임배추"없어서못팔아요,류시원●장동건줄줄이과속스캔들,85만원수입화장품,원가는18만원?너무하네......정, 정말 너무하네!

오늘밖에는 없는 나. 크게 허풍을 떨어보자면, 오늘을 지워버리고 싶은 나.

 

 

지금은 이 시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코로나가 대유행한 날을 2020년으로 퉁치지만 새해가 되어서도 상황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싶으니 말이다.

원래 나르시스트는 자기 혐오로 스스로를 포장해서 보호하기 마련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야코프스키의 총알 중에서

 

위대하게,

노을 아래 고리끼광장을 지나

옷깃을 추스르며 헌 밧줄 하나 숨겨

친구에게로 가고 있는 것이다.

ㅡ역사, 혁명, 사랑,

목 부러진 시든 해바라기 따위를

밟으며, 짓이기며 천천히

왼손에 검은 장갑을 낀 채 나는

어두워지는 광장을 지나가는 것이다.

쨍, 거울이 깨지고

연극은 끝났다.

ㅡ혁명의 진정한 의의는 혁명이 일어난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지켜보는 관찰자들의 열광적인 반응 속에 있다.ㅡS. 지젝.

막은 내리고,

구멍 뚫린 우주여!

삶인,

너여!

 

 

사실 이 시엔 철학이라거나 역사에 관한 지식들이 간간히 삽입되어 있다. 그래서 최소한 지젝같은 사람조차 모른다면 이 시를 읽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걸 단점이라 보지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읽었던 철학책이나 역사책을 회상하며 훨씬 사고의 폭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마야코프스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혁명 시인으로 고리키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스탈린이 질투할 정도로 당시 인기도 구가했던 인물이다. 뭐 스탈린이 그 땐 넘버원이었으니 여자도 명예도 알아서 눈치보며 떨어져나가서 결국 스스로 자살하긴 했지만 말이다.

사랑이 온다면 중에서

 

초여름, 폭풍이 지나간 샛골목을 간다.

안팎을 잃어버린 문짝 하나, 누가 죽었는가?

사진은 없고 풀 자국만 선연한 앨범 한 장, 누가 죽었는가?

덧양말이 고스란히 끼어 있는 운동화 한 짝, 누가 죽었는가?

알 없이 비틀려버린 갈색 안경테, 또 누가 죽었는가?

표지만 뜯긴 누런 시집 한 권,

누군가, 기어이 찬란한 죽음의 도열에 뛰어든 그는?

 

사랑은 저쪽에서 왔네.

느린 발길을 자꾸 비트는 주머니 구식 핸드폰의 떨림으로,

하나, 둘, 셋 혹은 부지런히 소실되는 신호등 불빛으로,

기꺼이 건네주고, 끝내 건너가지 못한 저녁 그을음.

지친 바람이 키 낮은 입간판이나 돌릴 때,

사랑은, 아마, 저쪽에서 왔었네.

 

여름은 어떻게 시작되었던가?

우표를 바를 때였던가, 떨며 찢어 던졌을 때였던가?

비는 무엇에서, 어디로, 왜 쏟아지는가, 쏟아지려는가?

 

이 시집은 천천히 봤기 때문에 자주 책날개를 끼워야 했는데 그러다 우연히 거기에 적힌 시인의 이력을 읽어봤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라는 시집 제목이 적혀있다. 과연.. 나르시스트라 단정짓기가 편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은근히 사랑에 관한 시들이 많이 적혀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쪽도 서정시 관련 동인지를 결성해도 독특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았다. 하긴 그 앞면 쯤의 시에 목에 낀 때가 등장하는 건 문제가 되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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