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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초록의 감옥

여승 중에서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구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칩사온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고개가 갸웃해진다.
이게 어떻게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지?
엿보기와 스토킹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그렇지만 손 대지 않고 관찰하려는 마음은 왠지 알 듯도 하고.

 

 오랜만에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책을 읽은 듯하다. 쪽을 만들 때의 느낌을 시로 쓴 것처럼 시인은 한가하고 느긋하게 시의 처음을 자연으로 장식한다. 화사부터 약간 요동을 치는 듯하더니 후반부에선 뛰기 시작한다. 왠지 서정주와 비슷한 구절이 많아서 혹시 그를 동경해서 시를 짓는지 궁금했는데 제목만 비슷하고 서정주와는 조금 다른 정서를 보이는 것 같다. 서정주가 여성에 관한 판타지를 전개하고 있다면 송수권은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여성에 대한 몇몇 관점이 꼰대인 걸 애써 무시하면 말이다. 특히 시집 초중반의 어머니가 나오는 시들은 어쩜 그렇게 노스탤지어틱한지... 남도 사투리에 유달리 공을 들였다는 티가 나서 오히려 더 영혼없이 볼 수 있는 시였다.

 

 

 

단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같은 시는 괜찮았다.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이라는 책도 있었는데 둘 중에 누군가 한 명이 아이디어를 베낀 것일까, 아님 우연히 둘이 서로 통한 것 뿐일까. 혹 마음이 심란한 사람이 있다면 이 두 권을 다 읽어보아도 괜찮을 듯하다. 아니면 지금 내가 읽은 한 권은 시, 과거에 내가 읽었었던 다른 한 권은 산문이니 마음에 드는 걸로 잡아서 보시거나. 사실 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보다 이쪽이 더 좋은데, 배흘림기둥에 대한 묘사가 이 두 책보다 상대적으로 더 딸려서이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이 시집은 굉장히 내가 좋아하는 구절과 싫어하는 구절이 명확하다.

 

 

 

P.S 국어는 꾸준히 연습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수능은 저자가 모르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1등급이 나오려면 어떡해야 하나? 찍어라.

 

 필기체로 쓰여진 시를 읽으니 좋은 점.

 1. 글씨는 알아보기 어려운데 아무튼 커서 천천히 소리내서만 읽으면 어쨌던 읽을 수 있다. 덕분에 저절로 속도조절은 됨.

 2. 왠지 좌측에 타자친 글이오타가 아주 많은데(...) 저자의 육필은 틀린 게 없다. 틀린 게 있으면 먹물로(붓필기다.) 지우고 빠진 게 있으면 V표시로 첨가하면 된다. 하기사 나도 그래서 발주할 때 힘들어도 꼭 손으로 쓰지만... 타자칠 땐 실수가 많아서 한 번 볼 거 두 번 봐야 함 ㅡㅡ;;;

 

묵호항 중에서

고모부는 질펀한 동해에서 돌아와 무덤 속에 잠들었다

 

 

무량수전의 배홀림기둥에 기대어 중에서

천고에 몇 번쯤 학이 비껴 날았을 듯한
저 능선들,
날아가다 지쳐 쓰러졌을 그 학 무덤 같은 능선들,
(...)
부석사 무량수전 한 채가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의 노을 빛을 되받아 연꽃처럼 활짝 벌고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선묘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
마침내 태백과 소백, 양백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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