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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아나키스트에게

길마중

너를 잃고
비로소 나
이제 길 떠나네

한 번도
널 기다려
마중한 적 없는 이 길

기다림
마냥이었을
아득한
너의

 

 

 

 

일단 시집 뒤의 간단한 서평에서도 언급하듯이 협객을 기다리며라는 시와 행복한 눈물과 관련된 시 빼고는 정말 아무것도 얻을 가치가 없는 시집이다.

 

 물론 원래부터 시조를 강조한 서정시집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에게라는 훌륭한 제목을 생각해보면 정말 불쌍할 만큼 건질 게 없다. 과거에 아나키스트라는 제목을 지닌 시들이 대체로 훌륭했고 무엇보다 이 시집 전에 읽었던 황지우가 이 시인과는 정반대의 국가주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훌륭한 시를 써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철저히 국가주의적인 관점을 배제한 시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의 행복해서 울어보지도 못한 불행'을 이야기한 점에서 정치적인 관점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밤을 새우는 화자의 정성과 그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이기를 고집하는 그의 앞길은 까마득하다. 게다가 그가 찬양하는 숲이나 산마저 그가 돌아서기를 바라는 듯하다. 결국 화자는 그를 버리고 떠난 사람을 기다리다가 길을 떠난다고 나와 있는데, 그 사람이 떠난 길을 따라가는 건지 아님 다른 길을 택한 건지는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어차피 둘 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충실히 간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어쨌던 협객을 기다리는 그의 자세는 왠지 '고도를 기다리며'를 생각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시의 퀄리티가 그 정도일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라. 글을 써서 책으로 낼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기다릴 필요 없이 글을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서 자신이 협객이 되야 하지 않겠는가. 누군가 가슴에 못을 박는다면, 못이 심장을 뚫어 그곳에 맺혀 있는 무언가가 콸콸 시원하게 나올 정도로 박으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 시집은 나에게 너무 유약한 느낌을 준다.

 

수유리에 살면서

수유리에 살면서 내 가장 즐거운 날은

밤새 비 내려서 계곡물 넘치는 때

그 소리 종일 들으며 귀를 씻는 일입니다

어떤 때는 귀 혼자서 고향 냇가 다녀도 오고

파도소리 그립다며 동해 나들이도 즐기지만

이 날은 두 귀 하나 되어 꼼짝도 않습니다

수유리에 살면서 안빈이란 옛말을

새록새록 곱씹을 때도 바로 이런 날입니다

당신도 들었으면 해요, 귀 씻는 저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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