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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중에서

사람이 희극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위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격이랄까,
사람이 만화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비록 사나이 나이 사십 넘어서 "내가 헛, 살았다"는 깨달음이
아무리 비참하고 수치스럽다 할지라도, 격조 있게,
이 삶을 되물릴 길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 인정하기 조금은 힘들지만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무위도식배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종일,
격조 있게, 놀았다

 

 

 

 

 문제는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전혀 새로운 세대의 관점과 사상이 메인으로 뽑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386세대라는 단어가 다시 부활된 게 그 중 하나이다. 386세대와 80년대는 거의 동일한 호칭으로 불리는데, 운동권을 전전하다가 안기부에 붙잡혀 끌려갔다가 돌아왔던 사람들을 의미하는 바이다. 그들은 낙인이 찍히거나 수배당하여 마치 유령처럼 사회 속을 배회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의문인 건 노무현 때에도 그랬듯이 이번에 문재인에게 투표한 사람들도 386 세대라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이 다른 사람들의 말 한번 들어보지도 않고 FTA로 우리나라를 전면개방하여 나라가 풍비박산이 난 건 누구나 알고 있다. 386 세대 외의 진보 지식인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비방하고 권력을 잡으려는 속셈이냐며 돌을 던진다. 그러나 그들이 권력을 추구하려 했다거나 돈을 탐냈다고 보기엔 다소의 무리가 있다. 어쩌면 그들은 나처럼 당장의 악몽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투표를 하러 나갈 때, 노인들이 투표장에 몰려오는 광경을 보고 (노인차별을 하긴 싫지만) 내심 두려웠던 것처럼, 어쩌면 그들은 적폐청산을 외치는 홍준표를 보며 감옥으로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던지도 모른다.

 

 

 

황지우 시인은 명백히 분열증을 시로 묘사하고 있다.

 

 시 2편에서 자신을 '그'로 묘사하고 있으며, 석조 두개골을 자신의 가면으로 상정하여 연극을 하듯이 시를 진행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은 유명세를 탔지만 소련은 망해버린 때 그의 시는 이제 처절하게 자신을 파헤치고 있다. 마치 육신은 죽었어도 하늘, 즉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계속 유리창으로 기웃거리며 집 안을 들여다보는 지박령을 연상시킨다. 술은 시 5편 당 한 번씩은 꼭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무서워할 줄 아는 그는 마치 갓 잡은 생선처럼 격렬하게 몸부림을 칠 지언정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대중들에게 교훈이 되는 새로운 시를 써달라는 사람들의 독촉을 신랄하게 조소하는 시들이 이를 증명한다. 어머니의 죽음이 시인의 감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그 어머니도 보통이 아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는 십자가를 며느리에게 물려주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화자와 독자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라 해야 할까.

 

 

계속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바깥으로 나갈 것이냐 말 것이냐, 혼자 있을 것인가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사람들을 볼 것인가를 망설이던 시인도 마침내 시들 안에서 해결책을 본다.

 

 설령 어떤 시에서는 베어버렸지만, 아무튼 그는 바깥을 향해 팔을 힘차게 뻗는 나무들을 보면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무교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폐인의 삶을 알고 글을 쓰게 된 시인으로서 서정시를 쓰기란 힘든 일이고 다소 비겁한 일이 될 지도 모른다. 그가 시를 쓸지, 아님 교수로서 '생태꼰대' 작품만 쓰지는 않을 학생들을 키울지가 기대되는 바이다. 시는 하나하나가 매우 훌륭하다. 일단 이 리뷰를 쓰면서도 어떤 시를 인상깊은 시에 선정해야 할지 너무나 많이 고민했다. 아예 그냥 다 올릴까 생각할 만큼, 버릴 시가 없었다. 결국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중 저 구절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쪽을 선택했지만. 석조 두개골을 올렸다가는 그냥 시 한 편을 다 올려 버릴 것 같았다.

 

 

 

다만, 무언가 작품에서 변화를 꾀하기엔 이미 시대가 많이 지났고 시인의 생각 자체에 이미 한계가 오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난 1930년대 시인들의 시를 보는 심정으로 읽었다. 이미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시인들의 시는 상당히 많다. 그러나 바깥에는 또 다른 바깥이 있다.

 

서해까지 밀려 있는 강 중에서

밧줄에 매달려 있는 여의도; 꼼짝도 않는 차량들 사이에서
오징어를 높이 쳐들고 다가오는 청년이 내게 말해준다:
동해에 잠수함이 나타났다! 동해에 용이 나타났다!
우린 모두, 어리석은 백성이오, 나무를 믿으시오,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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