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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사랑

어느날 너에게도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미친 꽃들처럼
봄을 온통 들어올리는 그 웃음소리처럼

그리고 너는
자궁에 물이 마르고
고름이 흐를 때까지
오래 여자를 헤매일 것이다

시궁창에 제 새끼를 버리고 노랫가락을 두드리는
여자의 가랑이에선
또 물이 흐르고

저기 봐라, 술병 속에선 꽃들이
벌써 벌건 속잎을 벌리고
환하게 젖고 있다

 


 


하이네나 괴테를 보는 듯하다면 너무 과한 비유일까? 아니, 이건 마치 쇼펜하우어의 사랑은 없다를 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노동시집에서 사랑이란 제목으로 이렇게 섬세하게 부정적으로 쓰여진 시를 발견할 수 있다니! 노동계에서 거리를 둘 때 쓰여졌다 하지만 여하튼 노동시에 대한 편견이 떨어져나가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인휘씨도 이것과 비슷한 내용의 글을 쓰신 적도 있었고.



 


광명 철산은 내가 살았던 곳이다.
치과 갈 돈이 없어 이가 전부 까맣게 썩은 내 절친이 잇몸이 드러나게 씩 웃었던 곳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를 보니 그가 사는 곳은 내가 사는 곳과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니체가 말한 가장 험준한 산 꼭대기에 도달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았던 사람같았다.


나이 치고는 꽤 빨리 민주화 운동에 발을 들였다고 한다. 노동 쪽은 85년도가 암흑기였다고 한다. 구로동맹 파업 후 지독히 감시 탄압을 했다고. 그 시기면 아마 수배 중이지 않았을까 싶다. 시인은 1984년에 첫 시집을 쓰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구로에서 인천가서 노동 관련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신 듯한데 노동이 85년도부터 암흑기면;;;; 어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다 철렁하네..

팔오년 구동파 이후 공단엔 칼바람, 불신검문. 밤늦게 불만 켜져 있어도 통반장들이 정보과에 연락했다고 한다. 현장 투쟁이 납작 엎드리고 어디서 털렸다는 소문만 들려오던 때.
팔육년 삼월. 다시 동맹파업이 일어나지만 일거에 제압당했다 한다. 그 때 박영진 분신. 전국 노동자들이 그를 살려내라고 거리 시위까지. 그러다 5.3항쟁 부천서 성고문 사건, 광산 프락치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강경대 이한열 살해, 6.10항쟁. 그러니 육십 항쟁을 만든 건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뭐 그렇게 어려운 노동시는 아니다. 사실 사랑시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많이 어두운 시들이긴 하지만. 사람은 썩어야 세상의 거름이 된다. 마음 속에 간직한 그런 사랑, 세상과 당사자가 거부하는 그 외사랑도 썩어서 낮게 흐르면 세상의 거름이 될 수 있을까. 문예계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금지되다시피 하다. 사랑이나 어머니같은 단어가 기존의 문학에서 너무 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은, 이해인 수녀의 그것이 느껴진다. 이해인 수녀는 남녀간의 정으로 표현되던 사랑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나는 이 시에서 노동계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읽는다. 그래야 세상의 텅빈 구멍이 울릴 수 있다. 남녀간의 정은 최근엔 그저 사적인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낡은 집 중에서

(제발 80년대니 90년대니, 그런
헛소리로 나를 불러내지 말아요
나는 지금 2000년대의 근사한 헛소리를 씹고 있고
달콤한 똥을 싸고 있다구요
밤새 불을 켜고 있던 불륜의 활자들이
얼굴을 처박고 벌써 납덩어리가 되었잖아
아, 나에게도 홈페이지가 있다면
무슨 별이 뜰까
소주병이 애국가를 나발부는 이 질탕한 밤에)
(...)
기억은 늘 둔중한 지하철처럼 시간을 깔아뭉개고 지나갔어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맞는 말인 듯하다. 쌍팔년대 90년생 뭐 그리 중요할까. 사르트르도 그러지 않았나 과거는 과거고 사람은 현재를 살고 있으며 자신은 미래에 좀 더 진보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고 있다고. 기억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나 진정으로 진보한 사람의 의식이 이 책에서도 느껴진다.


일이 생겨서 인천으로 왔다. 사람은 적고 개펄이었던 곳엔 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곳곳마다 직원을 구하는 포스터로 가득하지만 실한 일자리도 아니고 그저 아르바이트 뿐이다. 새삼 여기에도 있었을 조개미 아짐은 조생이 자루 놓고 돈을 받아서 뭘 하고 싶었나 생각해본다. 왠지 현남 오빠에게에서 등장하는, 공부에 스트레스 받아서 여자애들과 사랑 없는 섹스를 하기로 했다는 중학교 남자아이가 생각난다. 결국 다 부질없는 것을.

시인은 묻는다. 욕망이 생의 에너지인지, 다만 추문인지를. 보통 시인처럼 무언가가 결핍되기에 사람은 욕망을 갈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얻으면 얻을수록 사람은 더욱 더 큰 것을 갈구한다. 시인의 경우 진정한 자본주의 타파에 대한 욕망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난 그의 절망마저 또한 삶의 에너지라 보았다. 철저한 추함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를 만든 바 있다.

욕망은 무엇인가를 강하게 갈망하는 것을 다양하게 뜻한다. 요샌 성적 욕망의 의미가 클 뿐. 그러나 원래 변태는 무엇인가가 전혀 속성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공부하려는 욕망이 강하면 더욱 노력해서 공부를 잘하게 된다. 매우 드물지만, 보통 훌륭한 학자나 철학자가 그러는 걸 볼 수 있다. 변태는 죽음의 공포마저 이겨내며 성의 욕구를 갈망한다. 그 정도로 공부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욕망은 목표하는 무언가를 향상시킨다. 성이나 공부를 말이다. 그리고 전보다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는 올바른 삶 중 한 예이다. 나는 박영근 시인이 뜻하던 대로 노동계에서 욕망을 이루지 못했으나, 시에서 비슷한 레벨의 경지를 이루어냈다고 본다.

 

 

인제를 지나며

인제 산촌 어디쯤인가 지나는데
눈보라가
외딴집 한 채를 비켜가네

거기서 나는 보느니
눈 맞으며
눈 맞으며
마당가 빈 나무 밑을 서성대는
누렁이 한 마리
훗날
먼 데
내 모양일레

지게문을 열고
머릿수건을 쓴 늙은 어머니
흰빛만 쌓여가는 마당을 물끄러미 내다보네

 


눈이 많이 오는 들판에 누워서 손과 발을 휘저어 나비 모양을 그리며 추위에 이를 달달 떠는 채로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시인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내 망상이겠지만. 그는 별들처럼 울었을까. '지긋지긋하게 눈물이 많았지. 지가 들이부은 술처럼.' 소설가 분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시인을 잘 아는 소설가의 말에 의하면 그 어머니는 자식 돌아올 날만 그리움으로 쌓다 돌아가셨다 한다. 그 자식은 누렁이처럼 갈 곳 잃어 서성거리는 것이라고. 장면이 너무나 갑자기 바뀌어서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싶었다. 그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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