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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Math

만약은 없다

"방금 이쪽 눈에 대못이 박히고 말았수다. 네일건으로 작업하던 중에 잘못 발사했소. 얼마나 빠른지 눈을 감을 틈도 없었소. 내가 방금 성한 눈을 뜨고 여길 열어 거울에 비춰 보았다오. 세상에, 그런 광경이 없더구만. 선생이 한번 보고 어떻게 할지 말 좀 해주겠소?"
놀라운 말이었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내심 떨리는 마음으로 닫힌 오른쪽 눈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욕설을 뱉었다. "이런 씨발."

 

 

 

 

 '못에 눈이 꿰뚫린 채로 대기실에 앉아있지 말라고오오오오으'라는 절규를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확하게 쇠꼬챙이가 뚫어버리고 지나갔다는 어느 책의 글귀가 생각났다. 기적적으로 환자는 살아났다고 했는데, 그 쇠꼬챙이는 대체 어떻게 제거했으며 그 쇠꼬챙이를 빼고 나서도 환자는 살아났을까. 쉐이빙크림이 항문에 들어간 이야기는 누군가가 그 안에 츄파츕스를 넣었다가 빠지지 않았다던 책 속의 이야기, 그리고 간호조무사 수업을 받던 중 한 간호사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위하려고 어떤 여성이 질에 산장어를 넣었다가 병원에 갔다나.

여기는 응급실 원무과에서 근무했던 분의 이야기이다.

여관에서 술 한 잔 하다가 여친이랑 싸우고 여친이 삐쳐서 문밖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이, 침대 머리맡 전등에 목을 매서 실려왔던 청년이 생각난다. 심정지로 왔는데 결국 살아났다. 쓰레기 수거하던 환경미화원이 프레스에 팔이 들어가 잘려서 오시기도 했었다. 이가 부러져서 깨달은 적이 있는데, 머리카락처럼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부분이 사람에게는 의외로 많더라.

한 6~7년 쯤 전에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가 회복을 못하고 사망한 적이 있었다. 이식 수혜자 말고 공여자가. 신장이식 1만 건 했다 홍보도 하고 그랬는데 그 많은 케이스 중에 공여자 사망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홍보실에 있을 때 언론 대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회의에 들어갔는데 이 큰 병원에 그 많은 의사들도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기자들도 의학의 한계로 인정하고 이식이란 게 어렵다고 그냥 넘어간 일이긴 하지만... 대학생 딸이 엄마 살리려고 신장 떼어준 것이었는데 딸이 죽었으니... 참 안타깝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정말 죽음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것인가보다.

여기까지가 원무과에서 일하셨던 남성 분의 이야기.

 

 

안락사에 대한 논란이 요즘엔 식은 상태인 듯한데, 이 책에선 그 논란이 비교적 덤덤하게 쓰여있다. 

 

어떻게 해서든 환자를 살리려는 의사와, 더 이상 환자를 자신과 같이 있던 인간으로 볼 수 없는 보호자들의 절망스런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같이 침착하면서도 경악스런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심폐소생술 하는 사람도 고생이지만 지도하는 사람도 참 말이 쉽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심폐소생술 처음하는 사람에게 육성만으로 이것저것 가르치기가 참 곤란하겠다.

아니 죽으려면 청부업자에게 죽여달라고 시키던가. 아, 돈이 필요한가. 무튼 절개하는 걸로는 자살이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걸 이 책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뛰어내리던가 가스를 들이켜서 죽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자살은 만일 살아나면 아주 최악의 상황이 될 만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성공확률이 거의 로또에 가까운 셈. 거의 성공하더라도 만일 누군가 발견해서 저자같은 유능한 응급의학의에게 간다면 무의미한 일이겠다.

환자들 이야기만 계속 나오다가 무려 160쪽 분량이 되어서야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정치에 관심이 없나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의 인터뷰를 워커스에서 처음봤다. 즉, 관심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아무래도 남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지 못하면 법에 저촉되는 경우도 있으니, 아마 조심스러워져야 하는 특수한 직업정신이 몸에 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이스버킷에 대한 비판적 의견에 광우병에 대한 지나친 걱정에 쐐기를 박는 걸 보면, 다정다감해 보이는 얼굴에 비해 꽤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래도 부모님은 무난하게 만났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회초리로 토할 때까지 두들겨맞거나 후라이팬으로 맞은 적은 있지만, 머리뚜껑이 열리거나 술병으로 두들겨 맞은 적은 없으니깐. 대신 선생님들에게 당한 적은 많다. 뺨을 세시간 가량 있는 힘껏 맞거나, 어머니가 뇌물을 안 준다고 왕따를 유도당하거나. 그럴 때마다 물론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선생님이 되라는 부모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보다 연장자라고 무조건 반말 까고, 욕하고, 멱살 잡고, 소리지르는 인간들은 여전히 많다. 30대가 되도 말이다. 그럴 때도 항상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싸가지가 없다, 상냥해져라 하는 말은 항상 듣지만,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최소한 나는 살아있다. 남을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남의 말을 들을지 듣지 않을지는 본인의 판단이다.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사람 중 학대를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냉철하게.

작가님이 쓰신 글.
하이텔에 1200편. 블로그에 1400편.
내가 블로그에 대충 비공개 글까지 합쳐서 리뷰 1350편 썼는데 또 1300편을 더 써야 책 출간이 가능하다 ㅇㅇ

P.S 고대에는 전쟁에 나서기 전에 단체로 적군 앞에 나서서 스스로 목을 쳐 떨어뜨려 자살함으로써 적군의 사기를 꺾는 부대가 있었다고 하더라. 그러니 작가의 말처럼 자기 목을 쳐서 죽은 사람이 절대 없는 건 아니다. 단지 현대인들이 많이 약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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