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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Math

과학잡지 에피 창간호

이렇게 보면 '가짜'에 해당하는 이름이 붙어야 하는 쪽은 부정적인 수(음수), 상상의 수(허수)에 대항하는 '평행선 공리의 부정'에 해당하니 '(평행선 공리를 부정한) 기묘한 공리' 정도의 별칭으로 불려야 할 것 같다. (...) 이런 점에서 체계가 갖추어진 수학적 개념은 아무리 이상해 보이더라도 '가짜'라고 부를 수 없으며, 또 이것이 기존의 참인 명제를 부정하지도 않으므로, 기존의 수학 이론을 '가짜'로 만들지도 않는다. (...) 트럼프의 '대안적 사실'이란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수 개념을 발전적으로 확장한 허수에 이러한 거짓을 비유하는 것은 정확하다고 하기 어렵다.

 

 


차라리 당신의 대안적 사실은 허수다라고 쓰면 국내에서만 망신당하고 끝냈을텐데 우리나라 인간들은 꼭 눈에 띌려고 되도 않는 영어랑 산수 쓰다가 이렇게 망한다 ㅋㅋㅋ



아니 좀 찾아보고 나서 쓰던가 구글은 왜 있냐.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의한 영국 대공습으로 인해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전시관 중 일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표본과 귀한 서적들이 재가 되었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해양파충류의 골격 화석도 그렇게 되었다나. 이 해양파충류의 복제품을 어떤 젊은 학자가 보고는 이것이 새로운 종류임을 알아보았고, 평소에 자신이 존경하던 영국의 저명한 자연사 다큐멘터리 제작자 데이비드 아텐버러의 이름을 따서 '아텐보로사우르스'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한다. 근데 아니 애초에 전쟁해서 깨부수질 마 이것들아 복제판 있던 건 다행이지만 원본 깨부숴먹은 게 자랑이냐.

 

 

 
인공지능에 대한 챕터를 보고 전에 본 영화 노게임 노라이프 제로의 핵심내용이 생각났다.


슈비는 인간 세계를 파괴한 엑스 마키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별이 파괴된 잔해와 살아남은 인간의 처참함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느끼고 싶어 집을 버리고 유랑을 택한다. 즉 사색하고 방랑하는 인간의 길을 걷는 것이다. 예수, 붓다 등도 고행을 하면서 성인이 되니 딱히 방황을 하지 않도록 설정된 안드로이드가 아니라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은 든다. 좋은 인간을 만나 함께 살면서 받은 학습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무서워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이 아직도 전체적으로는 되먹지 못한 종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일상에서 받아들이려면 인간들은 좀 더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니 계곡 밑으로 반지가 떨어진 것도 섬뜩한 계곡 생각한 연출인가.

창조과학은 가짜과학인가?라는 제목의 논문글이 있었다. 처음엔 창조과학 밀어달라는 말인 줄 알고 봤다가 파닥파닥 낚였다. 파이어아벤트는 마구 까댄다. 그 다음 포퍼와 쿤과 러커토시의 견해를 다 모아서 마구 반격을 해댄다. 결국 창조과학은 진화론의 발꿈치에도 못 미친다는 소리이다. 굉장히 논리적이면서도 쏙쏙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이지만 애석하게도 주님에게 눈먼 우리나라 60%대 인간들은 이 글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우리 하나님을 욕한다며 돌을 던져댈 것 같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다 창조과학이 있다고 믿으시니 말이다. 에라이 세상 말세로군. 

 

 

 

소설란을 보면 인공지능이 이런 말을 한다.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가는 동안 가만히 있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올라가려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겉으론 참 좋은 말 같지만 마치 인간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슈비를 보는 것만 같다. 리쿠 같으면 인공지능의 저 대사에 분노했을텐데 말야. 강자가 그렇게 말을 하면 약자를 놀리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비록 저서는 없지만, 해리엇은 당시 영국 수학을 이끌었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는 대수학 및 분석 기하학을 연구했으며, 케플러와도 편지를 주고받는 등 일군의 학자들이 네트워크에서 저명한 수학자로 유럽에도 알려져 있었다. 수학의 우아함에 빠져 있던 해리엇이 수학 법칙이 지배했던 천상, 즉 천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 중세 이래로 대다수의 학문들이 고대의 문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읊고 주석을 다는 게 전부였던 반면, 천문학은 측정과 계산을 통해 천체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수정하고 보충해 나갔다. 하지만 16세기에도 천문학은 관측의 문학이 아닌, 본질적으로 수학에 가까웠다. 계산을 통해 월식을 예측하고, 달력을 수정하고, 주전원의 비율을 조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1543년에 발표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보다 좀더 세련된 수학적 버전이었을 뿐이었다.

 

 


소설도 있고 과학관련전시의 리뷰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에 친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접근하려는 글들이 많다.


나로서는 참 반가운 잡지가 아닐 수 없다. 만화도 있던데 그림이 아기자기해서 사진을 참 보기 드물었던 앞내용의 긴장을 완화시켜주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위의 글은 거기서 나온 나레이션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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