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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당신의 사물들

이듬: 쳇! 지금 없으면 영원히 없는 거잖아. 예전에 콘돔을 썼는데도 임신한 적 있어요.
민철: 킥킥, 너무 격렬해서 터졌나? 아닐걸요. 우리는 압축공기를 콘돔에다가 집어넣어 터질 때까지 강도 체크하고 누수 실험도 하기 때문에 불량률이 채 1 퍼센트도 안 돼요. 싸구려 저질 콘돔을 썼거나 사용법을 잘못 알았거나.......
이듬: 요새는 낙태도 어려우니까 터미널 화장실 같은 데 핏덩이를 쏟아놓고 가는 애들도 있대요. 입양특례법인가 뭔가가 만들어져 입양도 쉽지 않으니까 신생아, 심지어 태아까지 단돈 몇십만 원에 팔고 사려는 사람들이 북적인다고 해요. 인터넷 불법 거래를 통해서......
민철: 그래요? 말세군 말세! 언젠가 베이비박스 이야길 들어보긴 했지만. 그쪽은 이런 문제에 민감하네요. 아 참! 그래서 임신했던 애는 낳았어요?
이듬: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배시시 웃으며) 이제 가야겠어요. 급식 시간 끝나가거든요....

 

 

 

 

평상시 편견에 가득차 있는 나는 시인의 사물에 관한 에세이들을 모은 것인데 술이 얼마나 등장하는지 세볼 셈으로 책을 봤다.<- 그런데 역시 여러 구절에서 등장하더라. 주로 같이 술을 마시는 데 대한 내용이 나오는 데서 공통점이 있었다. 심지어 아예 탁주를 주제로 글을 쓴 사람도 있었다. 역시 바다에서 마시는 술이 최고지.

 

 가끔 자신이 술을 마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가 술을 마신다던가 학대를 한다거나 이혼을 한다거나 하는 엄청난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막힘없이 풀어내는 글들이 많다. 심지어 이를 닦는 극도로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올라오기도 한다. 숨김이 없는 게 아름답다더니 정말로 하나도 감추려고 하지 않는 듯하다.

철학가들의 이름도 자주 나와서 좋았다. 특히 신현림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름을 대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의 이름을 읊조리면 자꾸만 가스등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녀도 혹시 의식하면서 일부러 그의 이름을 댄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일상적으로는 못 보일 것도 다 보여주는 이 책이 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문단계가 썩었다는 이야기가 요즘 자주 나온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젊은 시인들은 대조적으로 한없이 발랄하다. 그래서 무게가 없는 글이라거나, 부모님 이야기를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글도 보인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차지하다보니 이 책이 출간되었던 그 시절 너도나도 꺼냈던 세월호 이야기가 그나마 드물게 나온다는 게 장점이랄까. 결국 일상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역사와 자신이 겪은 삶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꽤 명랑하게. 클립의 이야기는 사건이 없다. 하지만 별다른 재료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도구적 존재는 그 도구를 쓰는 현존재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저자들은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두장으로도 그렇게 숨김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었다. 사물을 찬양하는 구절이 많았지만, 모두가 그런 구조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 또한 포인트다. 예를 들어 위의 구절에서 나오는 콘돔이라던가, 고통이 없다고 속일 수 있는 알약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 사물을 보는 눈을 조금이나마 새롭게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독자에게 사물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준다고도 생각된다. 특히 소수자들과 힘 없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에게, 보통 읽기 어려워보이는 미래파 시인들이 무릎을 숙이고 접근하는 게 느껴진다.

 

금으로 변한 은수저를 평생 팔지 않고 모시고 살겠다고 말한 지 2년 만에 팔찌를 팔았다. 통장에서 뒹굴어 다니는 것이 먼지뿐이었다. 돈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대관령 깊은 산 속에서 움막 교회를 짓고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계시는 귀한 분이 오신다는 소리에 단 한 번 머뭇거림도 없이 냉큼 보석방에 주었다.
최인숙 시인과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박흥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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