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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

부치부치

팸을 본다 비빈다 맡는다 빤다 듣는다 눈을 감는다 나타난다 뜬다 사라진다 떠올린다 나를 나타난다 잊는다 나를 사라진다 나는 침대에서 깜,빡,껌,뻑,끔뻑, 깬다 다시 깬다 계속 깬다 벗어날 수 없다 꿈이 나를 꾼다

팸이 나를 깬다

악마의 드레스 자락을 밟는다
파란 하늘이 찢어진다
팸의 피부에서 밤이 번진다
지구가 출렁, 마리아나 해구
은사시나무가 자란다
까막딱따구리가 구멍을 판다
원앙이 둥지를 침탈한다

버뮤다를 이을 펜촉이 물에 빠진다 나의 성기를 움켜쥐고 아스팔트 수면에 서명을 한다 돌이 날아든다 팸을 뚫고 바람을 뚫고 피가 투명하게 흐른다

바다의 처음에서 암덩이가 부화한다 빛이 발한다 암세포가 전이된다 사람의 탈을 쓴 사람들 암세포를 쬐기 위해 사람보다 먼저 많이 쬐기 위해 정상을 오른다

안나푸르나에서는
눈물이 눈과 함께 얼어붙는다

죽은 범고래 새끼가 운다 주파수가 온몸에 닿는다 한쪽 눈가에만 경련이 인다 까막딱따구리가 범고래 입에 알을 넣는다 알에서 통조림이 태어난다 까막딱따구리가 통을 쪼아 먹는다 일렉기타가 바다에 떠다닌다 까막딱따구리가 기타 줄 위에 난장이를 눈다 난장이가 범고래 새끼를 먹는다 난장이가 가라앉는다 금요일 동안 가라앉는다

바다의 바닥은 하늘
하의만 벗은 난장이가 난다
수직으로 난다
하늘의 끝은 땅

팸이 사라진다

통조림 안에서 사람은 죽었고 신이 태어났다 뚜껑을 딸 사람이 없다

 

 

 

 

사실 이미지는 BDSM이 강렬했지만, 안나푸르나가 나온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안나푸르나가 한 번밖에 안 나왔는데도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을까. 눈물이 얼어붙는다는 대목이었을까? 최선을 다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낫다느니, 침묵을 두려워하면서도 침묵을 지킬 때는 두려움보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라느니, 상당히 아포리즘 같으면서도 맘에 드는 구절이 많았다.

 

 

 

확실히 시의 느낌은 참 좋다. 팸과 부치, BDSM, 그리고 기타 그쪽 계열에서 전문적인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림자 쪽으로 좀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게다가 내장 기관을 자세히 이미지화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폐포가 계곡에서 물방울과 같이 흐르면서 흩어지는 이미지는 강렬했다. 훌륭한 시인은 이별에서 많은 교훈을 얻으며 죽음을 직시한다던데, 이 시집이 그 훌륭한 예시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시인 자신의 환경으로서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가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여성에 관해 생각하는 건 훌륭했다. 특히 모두가 어머니하면 출산을 생각할 때, 이 시인이 생리를 떠올리고 그걸 고어틱하게 표현한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왜 그의 '다르게 생각하는 시선'이 사회의 현상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 점에서 김사람 시인을 제외한 모든 시인들이 드러내는 꼰대성이 은근히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폴리아모리에 대한 시선이 그러하다. 동성애자는 미셸 푸코가 자신의 명성에 어느 정도 이용한 경우가 있어서, 요새는 특이하게 보이려 자신을 소개할 때 '이반'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는 관계에 엮어지는 사람들끼리의 동의가 필요하다. 만약 폴리아모리를 사칭해서 바람피는 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시를 쓴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폴리아모리 자체를 비난하며 일대일의 '트루 러브'를 찬양하려 한다면 역시 이 시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만일 폴리아모리가 근시일 내에 동성애자만큼의 메이저성을 얻는다면 반드시 지적을 받을 거라 생각된다. 어쨌던 자신의 의견이라고 주장하며 인격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나도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어서 바로 사과했는데, 역시 문단계에 있다는 사람은 다른 것인가?)

 


하스피텔 마이너스 23시 59초

치마 속에는 비가 치렁치렁 내렸다
길 잃은 미아처럼 어둠이 되어가는 얼굴들
만지고 싶어서 스스로 어둠이 된
이바는 행복하다 믿었다

어둠은 돌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시야 확보가 어려웠지만
능숙한 손놀림으로 덩어리들을 꺼냈다
피 묻은 쇳조각들
떨리는 손에 전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이바는 혀로 핥고 또 핥았다

어둠은 철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의사는 메뉴얼대로 조립하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빠져 있어"
"제대로군!"

어둠은 질서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완성된 조각의 입에 이바의 입을 강제로 맞추고
긴 어둠을 불어넣게 했다
쇳덩이들 속으로 핏줄들이 돋아나며
눈동자에 깜빡깜빡 불이 켜졌다

어둠은 생성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의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이바의 남편이 들어와 돈을 건넸다

어둠은 세계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여기서 네토라레란 NTR로도 쓰이는데 남의 여(남)친 혹은 아내(남편)을 뺏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장르를 말한다(...)

 

이바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오던데, 만인과 사귀고 다니는 여성을 이미지화했다는 사실이 이 시에서 드러난다 할 수 있다. 히키코모리야 요새 무난하게 쓴다지만 설마 이 단어를 쓸 줄이야. 정말 무라카미 류 같다는 느낌이다.

 

 

 

P. S 블로그 보시는 분들은 다들 알겠지만 다시 말하겠음. 시집의 해설은 볼 때도 있고 보지 않을 때도 있는데 미래파 시집의 해설은 별로 안 봅니다. 평론가에 따라 아주 편협한 시각으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솔직히 뒤에 소개글만 봐도 대충 그 시의 이미지가 잡히는 경우가 많고, 김사람 시인의 이번 시집도 그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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