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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깊은 밤 기린의 말

저자
박완서, 최일남, 조경란, 이청준, 이승우, 윤후명, 김연수, 권지예, 이명랑, 이나미 지음
출판사
문학의문학 | 2011-03-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박완서ㆍ이청준ㆍ최일남ㆍ윤후명ㆍ이승우 권지예ㆍ이나미ㆍ조경란ㆍ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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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믿네. 상대가 마누라일 때는 복상사가 절대 없다는 의사의 말은 믿네만."

"이럴 수가. 메멘토 모리."

"아무렴. 메멘토 모리."

 

 

 

게임을 하다보면 엄마아빠를 팔아대는 욕설까지 하게 된다는데,

최근엔 그에 맞서려는지 인터넷 고스톱 게임에서 장년 노년분들의 욕설이 캡쳐되서 속속들이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다.

근데 난 이 분들의 욕설이 왜 그렇게 정감이 가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었나 (...)

 

 욕설 할 때조차 이 새끼 저 새끼가 아닌, 상대를 아무개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섹드립에서조차 뭔가 관록이 묻어나는 느낌이지 않은가? 할아버지(혹은 할머니)가 그 사람의 아이디를 부적 종이에다 직접 적던가, 혹은 어떤 영험한 사람에게 적어달라고 하는 장면이 상상되면서 웃음이 터져나온다. '인명이 제천'이라는 고명한 한자어는 또 어떤가. 이 소설 또한 그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최일남 작가가 쓴 국화 밑에서라는 소설에서도 등장인물이 주인공에게 '인터넷이 주류인 이 세상에 한자를 남발하다니 시대에 뒤떨어진 거 아닌가?'라는 식으로 질문한다. 일종의 자기 디스이면서, 한편으로는 장년의 유머감각을 은근히 자랑하는 듯한 문장에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보통 소설을 볼 땐 마지막 문장 마지막 단편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최근 소설이라 보기엔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단편이어서 깜짝 놀랐다.

 김연수 씨의 깊은 밤 기린의 말도 상당히 좋았다. 문체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체장애 막내와 눈 먼 강아지의 교감을 바라보면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그만 마음이 짠해지고 말았다. 여러 모로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박완서 씨의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도 잘 봤다. 르포인듯 아닌듯하게 한 갱년기 여성의 하루를 쭉 흘러가듯이 보여주는데, 한 사람의 사생활을 뜯어본다는 건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너무 짜릿한 일이다.

 권지예 씨의 퍼즐도 잘 봤다. 그놈의 힐링 타령 때문에 요즘 스산한 소설을 못 본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생각한 참인데, 등골까지 서늘함을 느끼게 해줘서 몹시 반가웠다.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도 충분한 소재였다. 내가 무른 곶감을 못 먹는 이유가 이 소설에서 공개되는데, 내 사생활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상세히 쓰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 소설도 남자들 필독서이다.

 이명랑 씨의 제삿날도 국화 밑에서랑 비슷하게 찰진 유머 감각이 씁쓸한 성인들의 세계를 살포시 덮는 듯한 감각이 나는 소설이었다. 출생의 비밀이라는 식상해보이는 소재를 저렇게 창의적으로 발휘할 줄은 몰랐다. 반전물이지만 권지예 작가의 작품처럼 후폭풍이 몰아닥치는 게 아니라 그저 약간 어깨가 흠칫,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으쓱, 하는 정도.

 조경란 씨의 파종도 잘 봤다. 특히 공감이 가는 문장이 있기에 가져왔다. 이 작가의 혀라는 소설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신경숙 씨의 표절에 대한 글을 쓸 때도 이 작가의 표절 의혹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사실 딱 하나밖에 없는데, 이 작가가 쓴 소설과 원본이라는 소설을 비교해 볼 때, 문장 구사력에서 너무 차이가 나서였다. 조경란의 글은 확실히 20~30대의 여성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마치 일본만화계의 마스다 미리처럼 말이다.

 단숨에 쓰다보니 글이 길어지니, 여기서 마쳐야겠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2000년대 소설들, 2010년대 소설들 너무 좋다고 생각합니다. 꼭 읽어보세요.

 

 역시 나는 술마시고 난폭한 행동을 한 적도 없고 자해를 한 적도 없으니 알코올 의존증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술을 끊거나 줄여서 마셔야겠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알코올 의존일 가능성이 큰 거에요. (...) 의사는 의존증에서 회복되는 것은 자꾸만 발목이 빠지는 습지에서 육지 쪽으로 걸어가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고 충고했어요. (...) 이렇게 후타리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자니 그 말을 우격다짐으로라도 혼자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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