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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지금도 가슴 설렌다 달리: 내 낳을 때 어땠는데? 은희: 뭘 어때. 달리: 아프드나. 은희: 당연히 아프지. 낳고 나서 울었다이가. 달리: 왜. 은희: 딸이니까. 또 낳아야 해서. 달리: 흥, 둘 다 울고 있었겠네. 은희: 그래도 내가, 니를 낳고 얼마나 가슴 떨리고 설렜는지 모른다. 남편이 있다 해도 자식만큼 사랑할 수 있겠나. 나는 니 아빠가 첫사랑이지만 사실 진짜 첫사랑은 니다이가. 니가 처음 엄마를 부르던 날,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첫 생리 하던 날...... 모든 게 궁금하고 신기하고. 내 자식이니까. 지금도 나는, 니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 어머니는 내가 처음 생리할 때 하신 말씀이 "와씨 니도 이제 맨날 고생하겠네." 이랬다. 그리고 난 지금 일주일째 그날 중이라 하는데 ㄷㄷㄷ 고생 정도가 아니잖아요 엄니 ㅠ.. 더보기
노동자의 이름으로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약삭빠르게 살라는 말이냐구요? 난 당당하게 세상을 살고 싶은데 왜 형님은 움츠리고 눈치 보며 살려고 합니까? 형님이 현실을 보라고 하지만 그 현실은 죽어 있는 현실입니다. 죽은 현실이 보여주는 걸 배우라고요? 고기 한 점 던져주면 그거 집어 먹는 맛으로 살라구요? 그게 아는 겁니까?" (...) 봉수는 소주잔을 치우고 물컵에 술을 콸콸 따라서 단숨에 들이켰다. 물론 모든 인간을 믿어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의심병에 걸려 오버해도 이상한 인간이긴 매한가지다 ㅋ 어찌 옛날과 오늘이 한치도 다를 바가 없는지 책을 읽고 자괴감이 든다. 자동차 공장 다니면 여자가 싫어할 거라고 하는데 난 혼자 잘 놀고 어차피 애를 안 낳을 거라서 늦게 돌아와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ㅇ.. 더보기
햇빛사냥 "그리고 마지막으로 똑같은 반성문 천 줄을 써야 한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 줄이나? 차라리 책 한 권을 쓰는 편이 낫겠군. 소설 한 권 말이야. 젠장, 내가 알게 뭐야. 거지 같은 걸로 한 권 쓰고 말지. 그런데 천 줄이나 쓰라니, 한 문장 한 문장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건 연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한 걸 거야. (...) 나는 일부러 그걸 증오한다고 말할 텐데, 그게 받아들여진다면 최소한 내가 사랑하는 문장을 쓰게 될 것이다. "문장을 말해요!" "이삐랑가의 평온한 강변들은 들었노라......." (...) "이 아이가 완전히 돌았구먼. 애국가를 증오한다고?" 내가 듣기로 이 시기의 브라질은 우리나라의 80년대와 비슷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구절은 유머를 담아서 작가가 현실을 비.. 더보기
헌법의 풍경 종교인이란 원래 남들이 보기에 정상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플라톤이 어쨌는지 명확히 알진 못하지만 난 어쨌던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그 분의 말에 찬성한다. 스피노자는 자신에게 유익한 게 선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 유익한 무언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참 단순한 사람들이 많다. 사건이 생기면 땅값이 오를까봐 걱정하는 모습은 악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원자력발전소를 국내에 세우는 대가로 대체 다른 나라에서 뭘 받아올 수 있겠는가? 그게 터지면 분명 우리나라 자연계에 피해가 생길텐데 그걸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조심해서 쓰면 되지라고 퉁치기엔 이미 사고가 해외에 두 차례나 크게 발생했다! 러시아는 그렇다치고 우리가 그 장인정신으로 뭉친 일본보다 더 조심해서 쓸 수 있다고? 그리고.. 더보기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스포츠이며 오락인 동시에 승부의 전장인 당구라는 분야에는 밀고 끌고 빨고 돌리고 벗기고 먹이고 회전시키는 등등,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얼마간 색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무수한 언어적 표현과 함께 한탄과 억울함과 바람과 행운과 불운, 애원, 기쁨, 비탄에 어울리는 각양각색의 몸짓과 비명과 감탄과 호소의 표출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는 늘, 신기할 정도로 과묵하고 무표정했다. 인간의 희로애락 오욕칠정을 나타내는 표정에도 등급이 있다면 가장 높은 등급은 바로 그런 무표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꽤 책 이름을 오인했던 적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바흐친과 문학 이론은 바흐친의 문학 이론과 꽤 비슷해보인다. 그처럼 이 책의 이름도 '번쩍하는'이란 대목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 더보기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그가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젊은 여자가 들어와서 포도가 세 송이 담긴 하얀 접시를 내려놓고 나갔다. 그런데 접시를 내려놓은 곳이 집주인의 손에는 쉽게 닿는 곳이지만 우리가 손을 뻗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에 있었다. (...)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만호와 함께 오다가 점심으로 먹은 육개장에 벌건 기름이 너무 많은 것 같았는데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싸르르 아프던 배가 조금 나아지며 방귀가 새어나왔다. 기대치 이상이었다. 소설집이고 초단편은 아니지만 보통 두세장 정도밖에 안 되는 소설들로 이루어졌다는 성석제의 특이한 소설이 확실히 내 눈길을 끌기는 했다. 그러나 무라카미 류가 야성적인 젊음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세심하게 리드하는 성격이라면, 성석제는 다정하고 약간 헐렁한 성격의 글이라고 .. 더보기
혼불 2 "없어서 굶어 죽으께미 도적질을 했다먼 가련허기나 허제. 지집 밑구녁으다 처박을라고 관공서에 공금을 훔쳐낸 거잉게 가막소를 가도 싸제잉. (...) 아재는 인자 죽으먼 극락왕생허시겠소. 나는 딴 디 가 있을 거잉게, 죽은 담에 안 뵈이그덩 서운타 말으시오." "상놈 신세 나 하나로도 여한 없응게, 아재 나보고 장개가라, 자식 낳아라, 그런 말씸 허지도 마씨요. 지집 없이도 한 펭상 잘 살랑게요. 보나마나 뻔허제. 나 같은 상놈에 부모없는 떠돌이를 사우로 맞는 집구석은 또 오죽헐 거이며, 그런 집의 딸년의 각시라고 맞어서 자식을 나먼, 그놈이 커서는 내 속 상허는 이런 시상을 또 살 거인디, 무신 웬수로 신세 쳇바꾸를 돈다요......?" 메를로 퐁티의 이론으로 여자를 보면 공존으로 여자를 상상할 땐 여자.. 더보기
혼불 1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 (...) 생산의 근원이 여기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작품에서 남편을 두 번 잃은 소복여인이 잠깐 나오는데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요코 생각나더라... 간단히 말하자면 종갓집에 시집온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시어머니도 옛날에는 며느리였고 시할머니도 옛날에는 며느리였더라... 생각해보면 종갓집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없다. 종갓집 여.. 더보기
엄마의 골목 "하여간 네 아버진 친구를 너무 좋아했단다. 남자들이란 참!" 이별은 사별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때의 사랑을 후회하고 그때의 분노를 경멸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한다면, 당신은 그저 청춘을 낭비한 것이 된다. 왜, 당신이 만인에게 그렇게 잘 떠벌렸듯이 말이다. 그리고 청춘의 낭비는 죄다.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서 벌 받는다. 그렇게나 그 사람이 밉다면, 아니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상실감이 배가 된다면, 차라리 바다를 보고 하모니카를 불어라. 바이올린을 켜라. 목청껏 노래를 불러라.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 바다를 가라. 그리고 당신이 감히 버리거나 태울 수 없었던 그 추억의 물품을 버려라. 당신은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걸 .. 더보기
편의점 인간 "30대 중반인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가. 성행위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태연히 물어봅니다. '창녀와 관계한 건 포함시키지 말고요' 하는 말까지 웃으면서 태연히 하죠, 그놈들은. 나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데, 단지 소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내 인생을 간단히 강간해버려요." 참고로 주인공은 이 분처럼 모에하지 않습니다. 손가락과 팔에 털이 많은 타입이라고 하죠. 잠깐 동거했던 남자도 이 여자와 같이 살면서도 몸을 건드리는 것조차 싫어하고요. 이 소설의 그런 점도 마음에 듭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내 현재의 모습과 주인공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걸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정말 편의점에서 근무한다는 근본적인 점만 빼고는, 이 점원은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