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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Comics

그 산 그 사람 그 개

"네 아버지는 신을 믿지 않으니까. 그러니 신령스런 뱀을 볼 수 없지. 믿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야 신령한 그분을 볼 수 있단다."

 

 

 

나를 해치는 사람은 나의 입장으로서는 밉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해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입장으로서는 그들이 다 밉겠지만,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악마같은 초월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터무니없는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법이다. 반대로 나를 도와줬거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시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결과가 초래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님이 쉴 곳 없지만 또한 내 속엔 다른 사람이 너무 많아 나를 찾을 수가 없는 법. 적어도 아군을 해치는 일은 없도록 하자. 

 

 그래서 "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환경을 해치지?" 혹은 "통일하면 남한이 대박인데 왜 안 하지?" 같은 질문은 겉보기엔 존나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보다 더 웃긴 이야기도 없다.

 예를 들어 위의 인상깊은 글귀는 가오미의 일요일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온 문장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아버지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딱 잘라 주장하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웃 사냥꾼의 검둥이가 죽을 때 자신의 개 누렁이가 검둥이를 낳은 걸 보고, 아버지는 슬퍼하는 사냥꾼에게 검둥이를 준다. 가오미는 '사냥꾼의 검둥이가 환생했다.'고 아버지가 기막히게 잘 둘러댔다 찬탄하지만 그건 가오미의 입장일 뿐이다. 아버지가 그걸 정말 믿는지 안 믿는지에 대한 확인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재주라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오치의 외손녀가 말하는 타이밍이 굉장히 좋지 않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어 있다. 높은 사람 한 명 진료했다는 이유로 의사들 위에 군림하고 많은 돈을 버는 마오치가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뱀과 이웃으로 살기라는 단편에서 그런 관점이 훌륭하게 드러난다. 무차별 사냥도 아니고, 뱀으로 악기를 만들어서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기만 한다면 (자신의 운명과 집안을 말아먹는 일이긴 하지만) 악사도 어느 정도 예술과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중간 부분까지만 해도 뱀을 소중히 여기는 화자의 큰아버지가 변화하는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 올바로 살기란 정말 힘들기 때문에, 바른 사나이의 주변에 존경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힘듦을 같이 지탱해줄 수 있는 친구는 그닥 없다. 그게 바로 큰삼촌이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자기 기준에 맞춰서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언젠가 그 기준이 무너질 때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애초에 그 둘이 가끔씩이라도 이야기를 했더라면 수호뱀만큼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큰삼촌의 눈물을 무시하고 뱀을 데려다가 다시 키우면 무작정 수호신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큰아버지의 꿈은 마지막엔 '뱀양식장'이란 개념으로서 철저히 무너진다.

 내가 처음으로 3일만에 책을 다 읽게 되었다. 짧지만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소설들이었다. 아이들이나 식물들이나 '키운다고' 생각하면 야성을 잃어서 망친다는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