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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이야기책 읽어주는 노인 달 아래 손자 데리고 술 마시며 병석에 누운 사이 눈 내리고 추위 덜어 바라지 열어 놓고 달구경 하네. 말 배우는 손자 놈 자못 영리해 달이 우리 집에만 있는 줄로 알았지. 뜰에서 뛰놀며 달구경 하다가 내 수염 당기며 술을 권하네. 술잔을 바라보다 문득 외치기를 "이 달이 언제 할아버지 손 아래 떨어졌나요?" 들었던 잔 비우니 놀라 소리치기를 "달이 할아버지 입으로 들어갔네요." 목구멍 밑에서는 두꺼비가 움직이듯 가슴속에서는 별처럼 퍼지네. 손자 놈 밖에 나가 하늘의 달을 보고 "할아버지 언제 달을 토했나요?" 조선 후기에는 할아버지가 아이를 키우는 경우가 흔했다. 대가족을 꾸리고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낸 후 은퇴한 할아버지가 자녀에게 교육을 시키기엔 가장 적합했다. .. 더보기
오늘의 냄새 라키 술은 라키라키 중에서 라키 술을 마시고 라키라키 웃으며 소금 언덕을 걸어 올랐다 기온은 34도 체온은 37도 라키는 40도 오후의 빛이 사막 모래로 넘실거렸고 샌들 위에서 발바닥은 호떡처럼 익었다 술은 언젠가 잃어버린 영혼일까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모르는 소녀가 라키라키 웃었다 몸속을 떠돌던 술과 여기저기 마구 쏘던 태양이 정수리에서 만나 어질어질 헬륨 가스 목소리로 소녀를 불렀다 소녀의 이름은 기분 체온은 0.5도 나는 전생에 기분을 잃어버린 가엾은 라키라키 이제야 충만한 느낌이 드는군 기분이 웃으면 나도 웃었고 웃음은 올리브나무마다 요란한 풍뎅이를 매달아 놓았다 나와 기분이 팔짱 끼고 라키라키하는 동안 양젖 끈적이는 저녁이 왔다 저녁은 30도 기분은 45도 라키보다 뜨거워진 나는 이러다 죽을까 봐.. 더보기
촉도 스물두 살 중에서 ㅡ전태일 어쩌라 너는 스물두 살에 멈추어 섰고 나는 쉰하고도 여덟 해를 더 걸었으나 내가 얻은 것은 평발이 된 맨발이다 나는 아직도 스물두 살을 맴돌고 있고 너는 아직도 더 먼 거리를 걷고 있을 터 느닷없이 타오르던 한 송이 불꽃 하늘로 걸어 올라가 겨울밤을 비추는 별이 된 너와 그 별을 추운 눈으로 바라보는 중늙은이 이 시인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는 스물두 살ㅡ전태일인데 아는 척하면 빨갱이 될 거 같아 여태 공개 안 했었다. 뭐 지금은 보여주어도 될 만한 시대이니까.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 문학에서 많이 나오지 이미 인간에서 벗어난 탓에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분과 이미 나이를 상당히 먹은 화자... 그런 구도가 생각났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가도 호감도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 더보기
고래가 되는 꿈 엔젤 탱고 중에서 썩어 들끓는 냄새를 가리는 후추와 부추와 식초 덜 익은 몸으로 거미줄을 자아 천장을 끌어내려 앉히는 집거미와 국간장과 실고추의 사특한 이종교배 달무리에 뭉친 파란 밥찌끼로 당신이라는 잔반과 향료가 몸을 섞어 서로를 으깨고 비비고 (...) 당신의 불가해한 찬장이 나의 섭생을 훈육할 때 당신의 남자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고 당신의 조리법은 절망학이다 처음 시를 접할 땐 음식 만드는 얘기거나 러브 스토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시이다. 나도 요리 못해서 그러나. 능력과는 좀 다른 이야기같지만 ㅋ 비트 시리즈는 읽을수록 점점 노래가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PTSD에 대해 이렇게 잘 표현한 문학작품이 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화자가 뭔가 삶에.. 더보기
희치희치 축문 중에서 껍찔이 싸고 있는 속에 있는 것이 단단할 리 만무하니 껍데기는 버리고 테를 동인 널빤지에 쓰겠나이다 올해 처음 목과를 낳은 어미나무이옵니다 까닭 없이 우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고 허공에 손을 찔러넣고 바람을 섞고 또 섞는 습성을 가졌사옵니다 이리 쓴 것을 문설주 앞 돌멩이로 눌러놓사옵니다 소리를 먹고 자라 일생 이명에 시달리는 돌이옵니다 이따금 웅 웅 웅 혼잣말로 떨리다가는 말 것이니 어여삐 굽어살펴주시옵소서 물기를 버린 달의 밤 맑은 술과 별을 함께 구워 올리니 삼가 흠향하시옵고 촛농으로 없는 입을 봉하시매 기꺼이 무덤의 시간으로 드시옵소서 페친이 드문드문 벗어진 모양, 군데군데 치이거나 미어진 모양이라고 시 제목의 뜻을 알려주었다. 처음 들어본다. 나 이래서 공부했다고 할 수 있나(...).. 더보기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춘곡에서 드로잉 14 백화 가득하니 구리 언니가 보고 싶어 어두침침한 언니가 보고 싶어 막버스로 돌아간 언니가 보고 싶어 시집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생애 마지막에 어떤 얼굴을 하고 죽을까?'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염하는 봉사를 하는 중인 어머니께서는 이곳 신자들이 대체로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장례식은 친구는커녕 가족도 별반 오지 않는다. 나는 일단 그들이 마음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가볍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마치 시에서처럼 말이다. 헤어진 사람 중에서 정말 아까운 인물이 있다면 평생 두고두고 아쉬워할테고, 그를 위해서 짓는 연가는 한없이 애절하며 길게 이어지리라 생각된다. 굴에서 봄빛을 맞고 느릿느릿 기어나오는 뱀처럼 말이.. 더보기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 여성장애인 성폭행 지적 수준이 좀 낮다고 42세 되도록 시집도 못 가고 오빠 집에서 잔심부름해 주며 생명부지하고 있는 가엾은 여자 29살 먹은 조카가 잠자는 고모를 강간해 버리고 다음달은 60넘은 삼촌이 낮잠 자는 조카를 강제로 옷 벗기고 그 다음날은 동네 홀아비가 몰래 들어와 입 틀어막고 늑대짓 해버렸다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 속이라지만 여자인 조카를 고모를 이웃을 성추행하다니 대한민국이 법치국가 맞나. 대한민국이 복지국가 맞나. 다 좋은데 이 시는 좀 꺼림찍해서 올려봤다. 늑대도 그런 짓은 안 할 듯... 뭐 다른 건 다 넘어가더라도 시 자체가 좀 꺼림찍한 건 사실이다. 시대가 변하다보니 그렇겠지. 결말도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고, 뭔가 현실고발을 하고싶었던건 알겠는데 전체적으로 뭔가 하나씩 다 어긋나 .. 더보기
비우기 너에게 나는 거울을 본다 너도 거울을 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손을 내밀지 못하고 너에게 가시를 내민다 너는 온몸이 피투성이인데 나는 오늘도 채찍을 든다 언제쯤 널 그대로 볼 수 있을까 고뇌란 시는 포기하면 편... 하다기보다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하셨다는 증거이겠다. 한때 시 쓴다고 백일장도 갔지만 어느 새 사람들 수준이 높아져서 글을 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학창시절 어떤 친구에게 문예창작과에 가지 않을 거면 글 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었다. 그런데 그냥 백지에 뭘 채울지 고민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글 쓰면 안 되나? 문학너드들의 세계는 항상 혈투가 이는 것 같아서 나처럼 생각이 가벼운 인간은 무섭단 말이지 ㄷ 부활한 예수님이란 재생산된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부모.. 더보기
눈 먼 사랑 일화 육이오 전이라던가 어느 잡지사 좌담회 자리였단다 작가는 구상에서 집필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지 아님 곧 붓을 드는지 사회자가 소설가 최정희 선생께 물었더란다 소설가 최정희 선생 왈, 뜸을 들여서 발효될 때까지 기다리노라 대답했것다 순간, 시인 정지용 선생이 들고 있던 맥주컵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더니 아, 아니 그러면 문학이 누룩이란 말씀인가? 이래서 좌중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더란다 웃을 일이 없는 요즘 문단이나 작품들을 보면서 원로 시인 김규동 선생님이 들려준 한 토막 일화다 페북에서나 블로그에서나 제 의견 항상 까도 상관없는 거 다들 아시죠? 아니, 원래 내 천성이 삐딱해서 그런가 아니면 내일부터 개학이라 당장 1일 1병 술을 못 마셔서 빡쳐서 그런가. 영 저 시에 츳코미 걸고 싶어져서. 1.. 더보기
푸른 징조 적과의 동거 중에서 눈빛이 참 고운 주치의는 날 아주 착한 환자로 알아 꼬박 꼬박 병원에 오고 꼬박 꼬박 약사를 만나고 꼬박 꼬박 환하게 웃고 꼬박 꼬박 꼬냑을 마시고 꼬박 꼬박 불량음식을 먹고 꼬박 꼬박 불면증을 즐기고 꼬박 꼬박 바다를 보고 꼬박 꼬박 타라수를 마시고 꼬박 꼬박 잦은 통증과 함께 밤을 새우고 꼬박 꼬박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귀신놀이를 하기도 하는 내 안에 여자들이 알약의 주인들이지 시집엔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텔링이 있다. 화자의 몸엔 다양한 여자들이 산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 여성들을 죽이기 위해 화레스톤이라는 약을 먹는다. 이 시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약은 여성호르몬을 줄이는 약이기 때문에, 생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다. 왠지 본인 이야기 같기도 한데 ㄷㄷㄷ 아무튼 그 덕분에 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