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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빨랫대를 보고 말했지 중에서

최현우

몸은 하루에 십만 개의 세포가 죽는다

저 팬티는 삼 년 동안 낡은 육체

실밥이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허리둘레에 대한 기억을 끝없이 지우는 동안

어떤 헤어짐은 끝내 남아 성장해버린 팬티

(...)

팬티는 너보다 크게 늘어났다가

숨 조이지 않을 만큼 줄어드는 탄력을 배운 것

그러니 구멍도 무늬가 된다

이만큼이나 편한 팬티는 없다

입었다 벗고 다시 입고 벗었으므로

두 몸은 떨어져 있어도 한몸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색 바랜 팬티를 입으며 웃는 너

너의 늑골이 빨랫대를 닮았다는 생각

 

 

이소연 시인의 시를 읽으려고 빌렸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이런 시를 쓰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대놓고 드러내지 않은 채 페미니즘에 관해 써내려가는 게 이 시인의 장점인 듯하다. 설명하기 좀 곤란하긴 하지만 어딘가 에로한 요소도;

 

그나저나 임솔아는 시인이면서도 소설가였던 건가. 능력자이시네... 성폭력 근절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니 모두들 이 분 책 많이 읽어주세요.

 

착한 척하며 숨지 않고, 서로 아직 옮기지 못한 많은 것들에 말 걸겠습니다 중에서

김진규

별 하나 뜨지 않은 새벽에 조용히 방 안에서 전화를 끊고 난 뒤는, 담담하다 못해 암담했습니다.

베란다에 가끔 기타만 한 갈매기가 앉아 한참을 울다 갑니다. 밤길에는 라쿤들이 구석에 모여 자기 그림자를 빚습니다. 시로 아직 옮기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캐나다에서도 봅니다.

 

 

2014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시가 하나같이 암울하다. 이 시인 분도 당선 소감에서는 순하지만 시는 만만치 않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일상을 읊는 듯한 최현우 시인의 시가 도리어 돋보이는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당돌한 외침이랄까,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듯한 시들이 많이 당선되어 신선하고 보기 좋아 보였다. 또한 김진규를 비롯하여 여기서 뽑힌 시인들이 이후로도 문인으로서 활동을 많이 하는 듯 보였다. 이름이 익숙한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박세미 님은 예전에 건축가이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타워라는 시 등등 시에 독특한 그녀만의 특색이 있다. 게다가 시인 한 분 한 분마다 다들 개성이 톡톡 튀는 게 인상적인데, 박주용 씨는 50대에 쓰신 시라 그런지 굉장히 차분하면서도 아재개그를 군데군데 섞었는데 그 다음 순서인 심지현 씨는 성적 은유가 굉장히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달팽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중에서

이서빈

이렇게 느린 소실점이 있을까.

불도 켜지 않고 문도 잠그지 않은

달팽이 껍질을 집이라 부르면 실례지

들여다보면 뼈는 둥글게 말려 있고

살은 끈적끈적하다.

어떻게 살과 뼈를 따로 갖고 노는 생이 있을까

뼈 안에 살을 집어넣고 일일 연속극을 보는지

양쪽 안테나를 뽑아놓고

끌끌 혀 차는 소리를 내고 있다.

일인용 집이라 부르려다

일회용 집이라 바꿔 부른다.

빈 달팽이 껍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휑한 육탈이다.

수억만 년 전부터 언제나 같은 보폭으로 기어가며 문명의 한 자락에 제 이름을 새기고 있다.

 

 

방통대 외에 딱히 다른 대학교를 나오신 것 같지 않은데 필력이 굉장히 놀라운 분이시다. 어떤 대상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도 나름 갖추고 있다. 계속 시인으로 활약하셨음 좋겠는데.

 

모를 중에서

이영재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다 오늘은

우산을 갖지 못한 사람이 많아

적은 비가 내린다

연극은 최악이었다

휘파람을 불며

나는 좋은 결단력을 가졌다고

자책했다

(...)

병원 뒤뜰, 당위성도 없이 자라난

외래종 꽃들을 씹으며

내가 해야 할 연기의 감정이 회복인지

절망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

정류장이 아닌 곳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

 

 

시 한 편 한 편이 꽤 길어서 많이 축약해 실어야 했지만 잘 읽어보면 스토리텔링이 있어서 전체를 보는 게 좋긴 하다. 아무튼 긴 시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이 시인은 시들에 군더더기가 없어서 맘에 든다. 당선소감에서 앞으로 이력서를 쓸 예정이라 하셨는데 취직은 되셨는지. 그러고보니 시집 내고 취업해서 중동 지역 건설 현장에 간 시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뒤로 발표한 시가 없는 걸 보면 잘 살고 있는 것 같달까.

 

길 중에서

ㅡ16박 17일, 780km의 비망록

김샴

춘천서 진해까지 혼자서 걸어왔다

발바닥 물집 터져 굳은살 박인 자리

또다시 가시 꽃피어 걸음걸음 피, 피다

그곳에 산이 있어 올랐던 사람처럼

길 끝에 내 집 있어 희망봉 찾아가듯

동해서 남해 끝까지 배를 몰듯 달렸다

할머니 어머니의 병 깊은 불화에도

마지막 피눈물은 내게로 쏟아졌다

아버지 북풍한설을 혼자 덮고 떨었다

내 원죄 무엇인지 수없이 되물었다

무더위 무릎 꿇고 소나기 퍼붓던 날

허공에 무지개 피는 길 하나를 보았다

세상의 모든 길은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을 걸어와서 저녁상 펴는 밤에

가족이 한 밥상 가득 그릇그릇 앉는데

 

 

분명 2012년 신춘문예 당선시집을 읽었을 땐 자연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어서 좀 지루했던 시조가 2년 새 굉장히 달라졌다. 어떻게 보면 이전에 나왔던 현대시인들보다도 더 눈에 띄었다. 이 김샴이란 시조시인은 93년생인데도 창의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시조를 쓰는 재주를 지녔다. 국토 종주와 화자의 과거사를 왔다갔다 하며 능숙하게 잘 풀어냈다.

 

사이버 전사

김석인

내 눈의 접속로는 18인치 LED 모니터

길 없는 세상으로 두 귀를 열어놓고

엔터키 꾹 눌러본다, 또 다른 날 찾아

누구나 갈 수 있는 아득한 공간에서

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바타여

ID는 밤에 피는 꽃, 비밀번호는 ☆1i1

광장으로 날아간 내 칼은 한글 2014

시간의 벽을 넘어 데생각 도려내며

뒤틀린 구렁의 세상 밑둥치를 자르고

접었다 편 분노에 비켜 설 틈이 없다

자옥한 사람들의 욕망 속을 에돌아

불면을 삼켜버린 밤 비상구로 눈뜬다

 

 

예전에 어느 한 게임을 주제로 시집을 만들어 낸 사람도 있다고 하고 게임세계를 그려낸 시가 요새 많더라. 김샴도 비슷한 시를 냈다.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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