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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슬픔계량사전

 

 

연애가 필요합니다 중에서

 

앉지도 못합니다

서지도 못합니다

눕는 데는 더 힘이 듭니다

모든 감각기관들은 엉덩이 위에 부서진 몇 개의 뼛조각을 향합니다

밥을 먹으려면 꼬리뼈의 안부부터 물어야 합니다

바흐를 듣는 귀도 눈치를 봅니다

가장 멀리 있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머리조차 걱정합니다

안녕들 하신 거냐고?

엄지발톱은 자신까지 빠질 것 같다며 엄살 부려옵니다

 

꼬리가 필요합니다

퇴화기관이 아닌 당당한 꼬리가 있어야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살랑거리며 다가갑니다

권력 앞에서는 요망스럽게 흔들어 보입니다

앉을 때를 위한 꼬리전용의자가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꼬리뼈가 아픈 적은 없지만 옆에서 일하다 꼬리뼈 다친 동료를 본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다른 동료사원들이 꼬리가 나려나 왜 거기가 아프냐고 놀리고 그랬지. 아무튼 이 시 왠지 좋다 정겹다 ㅎㅎ

 

별 메시지 없는 시에도 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다. 우울과 고립, 낙망이 느껴진다.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짧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질문들로 마음을 치고 지나가는 것 같다. 니가 했던 게 사랑이었어? 외로워서 그저 잠깐 만났던 것 뿐이 아니었나? 추억이 있다고? 그런 거 금방 지워져. 그리고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선 뭘 해도 즐거웠던 게 아니었을까? 헤어진 게 슬픈 이유는 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네가 단지 다시 외로움에 빠지는 게 무서워서가 아닐까? 책을 읽어봤자 지식이나 스펙만 하나 더 쌓으려고 하는 것일 뿐 별 의미 없는 것 아냐? 등등. 이렇게 나열해보면 상당히 시니컬한데 시로 엮어져서 그런지 막상 글에서는 저자의 깊은 슬픔이 드러나 있다. 일상 얘기같은데도 왠지 모르게 저자의 관록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게 시인의 역량일까.

 

나날들

 

하나씩 떼어내어 하루를 마감해주는 일력을 걸어두지요

오늘 하나를 가볍게 떼어내지요

 

두서는 없고 나열만 있는 나의 하루는

열서너 시간쯤은 자야 하지요

자는 순간은 구름 위를 걸어 다녔던 발바닥이 풀썩 땅에 떨어져

발자국을 남기는 시간이거든요

 

태생부터 나였던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어설픈 몸짓으로 내 일상을 끌고 가지요

걸린 것도 없는데 납작하게 넘어지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엄지손가락부터 빨지요

 

태백에서는 에어컨 없는 여름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다가

졸아드는 연근조림의 안부는 미처 듣지 못해 까맣게 눌었네요

환풍기 사이로 연근 타는 냄새 따라 태백으로 가요

여행객이 던진 황지연못의 동전 한 닢이 되어

나날은 서서히 삭아가요

 

 

개인적으로 공감이 되는 구절들이 많다. 잠이 많다던가, 시험문제를 고쳤는데 사실 처음에 찍은 게 답이었고 그걸 내가 알고 있었다던가 ㅠㅠ 세상에 다양한 슬픔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주는 작품들이다.

 

셧다운 중에서

 

물고기가 지독히도 죽지 않았다

지난 여름 물놀이에서 잡아온 피라미 한 마리였다

물에 담가만 놓고 관심도 없이 버려두었는데

한겨울 속에서도 살아 있다

 

잊고 싶어서 잊은 게 아니야, 잃기 싫었을 뿐이야

쓸데없는 말장난은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디서 들었던가 읽었던가 헷갈리고 있었다

닫힌 입술이 더 이상 열려고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는 게 싫었다

 

손바닥 안의 TV를 본다

범죄자와 쫓는 자, 범죄자를 사랑한 여자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에 TV를 껐다

들은 말도, 읽은 말도 아닌 것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위의 소개글에서도 눈치챘겠지만 멜로물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구절들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그러나 사랑같은 단어들이 거의 출연하지 않는다. 함부로 사랑을 말하지 않겠단 것일까. 그런 애틋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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