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Queer

혼불 3

"나 울 아부지 한 번만 봤으면."
그 말에 비오리어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무슨 생각을 저만치 밀어내듯이, 번지는 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어디 가서 바. 없는디."
"큰 아부지라도, 작은 아부지라도, 누구 아부지 피 섺이고 탁인 사람 한 번만 봤으먼. 그런 사람 만나먼, 이러어케 손 한번 대 보먼 아부지 살 같을 것맹이여."
"살."
"잉."

 



 

솔직히 문맥 신경쓰지 않고
"살."
"잉."
에 줄 팍팍 치고 싶다.


비오리는 주막집 여자와 두부장사 사이에서 나왔다 하지만 생각이 깊고 예쁘다 하니 잘 살았으면 싶었다. 이미 강실이는 성격에서 나랑 안 맞아서 잘 살길 바라는 거 포기(...) 그러나.

 

"하문에다 박달방맹이를 쑤셔 박었드래."
(...) "첩도 일부종사 해양가?"
"아 첩은 머 벨 것이여? 여자로 났으면 헐 수 없능 거이제."

 

최근 아저씨와 딸내미뻘 여성의 로맨스 드라마가 나온다는데, 이 내용을 읽다보니 그게 스쳐지나간다. 남자들에게는 본처가 그랬단 소문이 파다하고, 여자들에게는 비오리가 바람나서 성난 아저씨가 그랬단 소문이 파다했다. 뭐 이런 것 때문에 왠만하면 나이차이가 너무 나면 결혼하지 말라는 게 내 지론인데, (한남인데 꼰대이기까지 한 남자와 결혼을 하니. 하물며 세컨드인데.) 안타깝네. 여자로 났으면 할 수 없다는 말이 너무 와 닿는다. 그래도 남의 말이라고 막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데. 난 뭐 처음부터 아저씨가 변태새끼라서 sm플레이를 가하고 본처도 영화 올가미 찍어서 비오리가 망가졌다는 데 한 표.

여기서부터 춘복이와 강모 강태의 이미지 역습이 시작된다. 춘복이는 근친 논란으로 시집도 가지 못하게 될 강실이를 신분 역전의 도구로 노리게 된다. 압도적인 자본의 차이에 눈이 멀어서, 자신조차 만만한 계급인 '여성'을 착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끝간 데 없이 이미지고 뭐고 다 추락한 강모가 '자신도 계급에 착취당하는 사람이다'라고 제법 설득력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강태도 이에 감화받아 평소 비뚤어진 어투를 버리고 진지하게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전히 강모보다 더 현실을 보지 못하고 꿈 속의 이야길 늘어놓지만, 일단 그 순간만큼은 혁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보게 되는 순간이다. 혼불은 누구나 가슴에 불꽃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한 인물이 선하게 행동하다 악하게 행동하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게 이 소설의 재미이다.

결국 과부가 아닌데도 과부 중 생과부 신세가 될 효원이 집안을 물려받기로 결심한다. 자본으로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때우려 했던 청암부인은 죽을 날이 되어서야 인월댁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한다. (아무래도 '그런' 사건도 있었으니.) 이제 지귀가 될 염려도 없을테고 남편에 대한 원한은 처음부터 없었으니, 그녀는 편히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효원은 남편을 사별한 것도 아닌지라, 평생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훨씬 독한 자본가로서 살아야 땅을 지킬까 말까 한다. 남편은 이미 자본가들에게서 토지를 뺏어 인민들에게 고루 나누어주려는 사상으로 빠져들었으니 적편이 된 것이나 다름없고, 거멍굴 사람들은 입을 무기로 삼아 그녀가 일으킬 실수를 기다리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고, 혼불 인물상 중 제일 나약한 강실이도 지켜야 하고. 무엇보다 창씨개명으로 이미 집안을 뒤흔들었고 언제 또 다시 집을 무너뜨릴지 모르는 일본 사람들이 불안하다. 청암부인의 혼으로 효원은 쓰러져가는 집안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인월댁과 청암부인 사이에서 백합의 기운을 느낀 건 나 뿐인가요. 청암부인이 죽기 전 인월댁과 나눈 대화에서도 가족 이상의 친구 이상의 각별함이 있었고 말이다. 세상을 떠난 청암부인을 그리워하며 하얀 속적삼을 나부끼는 인월 부인은 지붕에 핀 꽃 같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청암부인 불쌍하다 생각은 든다. 하지만 이 분은 죽기 전 애호박죽을 드신다. (...) 어쨌던 집안에 누워서 숨지셨고 비록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손주는 만주가서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신 정리하고 살뜰히 챙겨준다. 그런데 폐허를 보다에서 시인 강이산은 판자로 만든 집에서 쫄쫄 굶어 입에서 오물을 토해가며 죽는다. 그나마 저자가 생사를 확인하러 직접 가지 않았음 발견되었을까...? 확실히 지금은 과거보다도 사람의 목숨이 더 가벼워지고 초라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땐 모더니즘이라 양복 입고 다녔지 포스트모더니즘 나오니 사람들이 누더기를 입고 다닌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남.

이 소설이 왜 명작이냐면 이 세상의 소수(?) 한남과 독재자와 자본가와 꼰대들의 허울을 은연중 다 까발리기 때문이다. 꼰대가 굳이 양반이나 귀족 가문에만 있지 않다는 걸 가리키고 있는 건 둘째치자. 이 몰락양반은 노예도 없고 자신이 직접 밭뙈기를 가는 처지에다가 젊은 시절 공부를 많이 했다면 당연 불합리한 세상에 저항할 거라 흔히 생각될 터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솔직히 '나 같은 자식 낳을까봐 애 안 낳는다' 라던가 하는 건 다 핑계라 생각된다. 애초 이 분은 거멍굴 인간들처럼 힘든 농사를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굳이 굶어죽을 것 같으면 자존심 다 죽이더라도 손 벌릴 연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손 잘 먹여살리는 게 목표가 아니라는 것은 결국 내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겠단 이기주의와 같지 않은가? 심지어 거멍굴도 자기 자식 먹여 살리려고 귀족집에서 무료로 급식 아주머니 뛰어주는 판인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든 건 변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차별로 인해 애 낳기 싫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한다. 심지어 이 시대가 결혼이 몸 파는 걸로 생각된다면 아예 결혼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나머지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볼 일이다.

하도 본을 찾아보라기에 김녕 찾아봤는데 경상도에 있댄다. 그것도 남쪽이랜다. 하기사 할머니가 전라도에서 시집왔는데 일가에서 센세이션이 났다고 하니 무리도 아니다. (할아버진 그때까지도 거기서 사셨다고 한다.) 근데 난 남쪽만 가면 여수 제외하고 전부 차멀미가 나고 경치보러 갔는데 좋지 않은 사건이 나고 풍경 별로 좋지 않은데로 가게 되고 영 트러블이 나니... 그래도 한 번은 가볼 계획이지만.

마지막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간단히 식민지시대 왜놈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착취했던 기업 형태의 방식이라 보면 된다.)가 나온다. 농사를 계약식 비정규직으로 짓는 이야긴 줄 알았더니 소작료를 못 물면 그동안 그 토지에서 추수한 역대 작물들 다 빼앗아가거나 소작료를 내더라도 깡그리 훑어가는 형식이었다. 게다가 특정한 작물 외에 다른 먹을거리를 심으면 절대 안 된다 했다니 참 치사한 방식이다 싶다. 논문으로 보면 시큰둥할 이야기인데 소설로 보니 참말 일본놈들이 도둑놈들인게 실감이 난다. 하긴 그 무서운 호랑이도 씨를 말렸다 하니.

 


P.S 뜬금없이 올려보는 이번달의 근황.
한겨레 강의 가보고 싶긴 한데 혼불보고 줌파 라히리 보고 헤르만 헤세 봐야 해서 당분간 히키코모리 생활 좀 할 예정.
물론 여기에 리뷰 올리는 속도도 더 빨라지겠다. (과연?)

'Que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의 모든 비밀  (0) 2018.02.07
이것이 인간인가  (0) 2018.01.04
에로티시즘  (0) 2017.09.24
아라네스프의 시간  (0) 2017.09.03
나는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다  (0) 2017.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