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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Development

죽음과 죽어감

때로는 되도록 안 오거나 짧게 머물러주는 게 환자에게나 의료진에게 도움이 되는 가족도 있다. 스물두 살 된 자신의 아들을 아기처럼 다루면서, 자기 외에는 그 누구도 아들을 돌보지 못하게 했던 어머니가 있었다. 아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 아들을 씻겨주고 이를 닦아주었으며 용변 후 뒤처리까지 해주었다. 환자는 어머니가 나타날 때마다 짜증을 부렸고 화를 냈다. 간호사들도 환자의 어머니의 태도에 질렸고 점점 더 그녀를 싫어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사가 몇 번이나 그녀와 대화를 하려고 시도했지만 매번 불쾌한 말들과 함께 쫓겨나곤 했다. (...) 비록 건강한 관계로 보이진 않았을지언정, 우리가 두 사람의 관계에 개입한 것이 과연 그에게 도움이 될까? 어쩌면 간호사들을 '나쁜 엄마'처럼 보이게 만들고 구원자를 자처하는 우리의 환상에 찬물을 끼얹은 열성적인 어머니에게 우리의 분노를 표출했던 건 아닐까?

 

 

나는 앞으로 이게 중요한 테마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간혹 라떼는 말이야를 들먹이며 부모가 아이(자신)의 이빨을 닦아주지 않았다느니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부모가 이빨을 닦아주지 않는 시대를 살았고, 지금은 부모가 아이의 이빨을 닦아준다. 질투로 보이지 않으려면, 그냥 생각만 하고 말로 드러내거나 제재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만일 이 시대의 부모가 좀 더 나이든 세대(혹은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그 때 적절하게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답해주면 된다. 특히 아이 쪽이 다 죽어가 앞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듯한 환자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역시 이론은 원서를 직접 봐야 한다고 하지만, 이 죽음과 죽어감이란 책 만큼 정확한 설명인 경우는 없다고 본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하면 죽음과 고립,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이 다섯 가지 단어만 생각나고 의학과 관련된 것을 배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단어만 달달 외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쓴 작품은 복잡하고 전문 단어가 많이 쓰여져 있고 재미없을 것이라 치부하고 넘어가게 마련이다. 나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거나 말기 환자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혹은 죽음에 대해 다룬 책이라고 겁먹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들이다. 이런 책을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지 알게 된다면, 죽기 직전에 겪는 불편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숫자와 규모에 초점을 맞추고, 수업의 규모가 커지고, 교수와 학생의 교류가 사라지고 대신 폐쇄회로 TV 강의, 음성 자료, 동영상 같은 것으로 대체되고,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을 점점 더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이게 코로나19로 인해 급격히 앞당겨져서 실행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웃의 죽음이라든가 전투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고속 도로에서 죽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도 우리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믿음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며 나아가서 우리는ㅡ무의식 세계의 은밀하고도 사적인 영역 안에서ㅡ죽음이 언제나 '내가 아닌 내 옆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부정이 불가능해지면, 우리는 죽음에 도전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 한다. 고속 도로에서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었다면, 베트남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면, 마치 실제로 죽음에 대한 면역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우리 측 인명 손실의 열 배가 넘는 적군을 죽였다. 우리가 거의 매일 뉴스에서 듣는 소식이다. 이것은 어쩌면 전지전능함이나 불멸성에 대한 우리의 유아적 소망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의외로 흔히 볼 수 있다. 미친 소를 먹을 확률이 낮다며 일부러 미국산 소를 사먹었던 10년 전 우리의 모습이나, 혹은 일본에서 아직도 후쿠시마 산 채소를 굳이 먹으려 하는 경우가 그렇다. 북한 독재자가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굳이 예비군 군복 사진을 찍어 SNS에 뿌리는 한남의 유아적 심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로또같은 죽음의 확률이 자신에게 안 돌아갈 거란 보장은 없지.

 

만약 우리 자신이 죽음을 침착하게 대면할 수 없다면 어떻게 환자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그런 경우 우리는 환자들이 제발 그 끔찍한 질문을 하지 말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는 에둘러 말하면서 온갖 자질구레한 얘기들이나 날씨 얘기를 할 것이고, 민감한 환자라면 우리와 함께 게임을 하면서, 자신이 다가오는 봄까지 살지 못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다가올 봄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런 의사들에게 물어보면, 환자들이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절대로 진실을 물어보지 않는다고, 따라서 아무 문제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그 의사들은 환자들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은 것에 무척 안도하고 때로는 그들이 환자들의 그러한 반응을 유발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걸 누군가 알려줬음 좋겠다고 생각한다. 직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얼마 안 남은 기간동안 할 수 있는, 평소 하고싶었던 거 다 하고 세상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ㅎㅎ

 

그녀는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신자였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다. (...) 몸이 쇠약해질수록 그녀의 화장은 점점 더 괴기스러워졌다. 처음에는 붉은색 립스틱만 엷게 발랐지만 나중에는 화장이 점점 더 요란해지고 점점 더 붉어져서 광대를 닮아갔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옷차림도 똑같이 요란해지고 알록달록해졌다. 마지막 며칠 동안 그녀는 거울을 보는 것을 피하면서도 급격하게 흉측해지는 외모와 깊어가는 절망감을 감추기 위한 가면무도회를 멈추지 않았다.

 

 

ㅉㅉ 사이비 종교가 이렇게 여러 사람들 망친다니깐.

종교 말고도 여러가지 이유로 치료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죽기 전 하는 말은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라고 한다. 오히려 그들은 죽음으로서 삶의 짐을 내려놓을 때 더 편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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