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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육체쇼와 전집

 


육체쇼와 전집

저자
황병승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3-05-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관념의 허위를 기습하고 어린 시절 야만으로 회귀하는 몸짓 한국 ...
가격비교

 

악착같이 꿈꾸면서 악착같이 전진하면 악착같은 현실이 기다리겠지요
눈물을 질질 흘려야 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별을 모르면서 이별했다고 말하고
살아있으면서 지난 새벽에 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개새끼들
욕조의 자라들처럼 계속해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거죠

- 육체쇼와 전집 중 일부 p. 52

 

 이 책을 읽다가 남친에게 첫 부분을 잠깐 읽어주고 그 다음에는 혼자서 정독했는데 첫 부분만 읽어주길 매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ㄷㄷㄷ 애인과 헤어진 경험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시들이라서 애인하고 같이 읽을 만한 시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아무튼 그의 데뷔작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들이 마주하기 싫어하는 여러가지 사물과 행동들에 이야기를 붙여서 시를 만드는 건 마찬가지인 시집이다. 영화를 좋아하는지 영화를 보고 나서 시를 쓴 것들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영화이다; 유명하지 않은 인디영화엔 추천사도 써주고 나름대로 그 쪽에서도 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책 뒤에 적혀있는 난데없이 짤막한 시구절처럼

그의 시는 읽다가 사람을 흠칫거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의 시가 충격적이고 절망적이라고 해서 시학문의 무라카미 류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무라카미 류는 어떤 점에선 굉장히 속물적이고 통속적인 소설을 쓴다. 심지어 '대체 이런 글을 어떻게 당당히 출판할 수 있는 거지?'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쓸 때도 있다. 그러나 황병승은 지식인과 유명인사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라는 테마를 버리지 않는다. 마치 유모한테서 막 젖을 먹고 나온 공주에게도 서슴없이 아첨하는 인간들이 득시글한 돌잔치에, 혼자 검은 옷을 입고 출현한 마녀와 같다고 해야 할까. 세상의 밝은 분위기에 약간의 질투와 열등감을 보이면서도 그것을 숨길 생각도 없고, 그는 공주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다가올 참혹한 미래를 예언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인생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희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과거형이어서 애틋할 정도이긴 하지만. <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라는 시에서 그는 때묻지 않았던 시절을 보여준다. 또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마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격려하는 그녀와 '나'는 매우 쿨하면서도 상큼한 이미지를 준다. 실패로 점쳐진 인생을 살고 있더라도 잠시나마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나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거의 마지막 구절은 켈라그래피로 꾸며도, 꽤나 아기자기하게 보이는 문장이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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