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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아나키스트

악마를 위하여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된 그것을 나는 모른다

누구의 눈물과 누구의 체액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나의 일부였던 것이 사라지고 있다
시원은 어두운 주름이었다

그것이 나를 왜곡시키고 나를 해석한다
나는 노예이므로 굴종에 쾌감을 느낀다
미래에 사랑이 이루어지고 행복엔 날개 돋을까?

개좆 같은 진보, 개좆 같은 진보주의
미래라구?

(confusion will be my epitaph. I'll be crying......)

과거에 묶이는 일이 죄인가
몸 바쳐 사랑할 수 있다면 권력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

사랑의 노예가 되는 일이 벌 받을 일인가(사랑이 하룻밤의 꿈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뜨지 말 것을) 심봉사라면 눈을 뜨리라 공양미 삼백 석 그것도 자본이란 말인가
사랑 앞에서 눈 감는 자 나는 부속품이다 나는 기계의 일부이며 지금 녹슬고 있는 과거의 일부이다

무릎 꿇는 자의 행복을 거부하지 않겠다
천천히 부서지겠다
5월의 아카시아처럼

추억을 향해 후진하는 탱크로리, 운전석의 사내, 과거가 조립한 사내, 어디선가 본 듯한, 현재 속의 과거

거기에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의 흰 바람

그림자 없는 아득한 옛 땅, 이득이 없는 옛날
찬란하여 부서지기 쉬웠던
어떤 날의 불안, 부란
태양의 시절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 위에 해가 있다, 해 위에 풀이 있다, 풀 위에
빨간 피막을 걸치고 뒷걸음치는 석양
촛불 꺼지기 전에
금지되기 전에
황금의 기율 무너지기 전에
긴 사랑을 나누어야 할 밤



사람 위의 해, 해 위의 풀, 풀 옆에
길게 눕는 달그림자
바람의 손가락 피막을 찢는다



물 밖에 사람과 해와 풀
나무가 녹아내리고, 빌딩이 엉겨붙고, 아스팔트는 물컹거린다
점막은 따갑고, 눈은 충혈되고, 입속의 모래가 뜨거워진다
모래 혓바닥 위에는



지금의 나와 옛날의 나 사이에 사막 같은 동형성
복제 인간의 벌어진 입을

오동나무 잎으로 틀어막을 수 있다면
미역 같은 혓바닥으로 조롱할 수 있다면
차라리 질병으로 도피할 수 있다면

선언하리라 나를 파괴할 권리
셀프 킬러, 킬링 필드, 올드 필드

그곳에 옛날의 나
오늘은 오늘의 병든 나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내리꽂히는 불꽃
예광탄처럼 빠져나가는 타액, 정액, 림프액
그리고 신선한 분비액
한 방울 남지 않았다

내 몸의 크레바스, 빙하의 눈썹
그 순결한 틈으로
어둠이 빨려든다

새로운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구멍
잡종이여 번성하라
광합성하는 동물이여 지복을 누려라
나의 미토콘트리아는 외계가 고향
나는 흑체, 나의 흑체 복사, 플랑크의 상수
불변하는 나, 불꽃 속의 과거, 내 안의 불꽃

그대 따스한가, 그대 어디에서나 나를 느낄 수 있는가, 빙하 속에 어둠이 있는가
결빙된 어둠의 결의처럼 내 혀는 아직 따스하다

날이 밝아온다
사랑이 끝난 후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질이 말했다 : white male anerican
울부짖던 에디가 말했다 : white male american

나는 백인이 아니었지 미국인이 아니었지 남자가 아니었지
아니 남자였지 나는 헝그리 코리안
살아남기 위해 코메리칸이라도 되고 싶었던
어머니 표정 없이 말하네

죽을 때까지 선하게 살아라
아들아 나의 아들아
고난이 널 찾아올 테지만 이겨내라
아픈 몸과 더 아픈 몸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아름다운 남자가 되어라 나의 작은 악마야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버리고 포기를 배워라
이제 잠들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69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네 정맥 속의 뱀을 느낄 수 있단다

96년의 나는 늑대인간이었을까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는
엄마 얼굴을 들어 날 봐요
웃어봐요 담배에 불을 붙여줘요
어둠 속에서 할렐루야
한 땀 한 땀 세월을 읊조리는
엄마의 목소리 자꾸 가벼워져
나는 웃다가 울기도 하지만
똥구멍에 털이 돋기도 하지만
엄마 오늘 밤엔 울지 말아요
대신 우는 나를 쓰다듬어줘요
따스하게 발톱 내밀고 고양이처럼
상처를 핥아줘요 이건 열상이에요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의 전염병이에요
나를 잣는 엄마 이제 풀어줘요
할렐루야 울지 말아요
한 번도 없었던 사랑 때문에
저 푸른 초원의 그림 같은 약속 때문에
쓸쓸하게 흔들리는 엄마

69년의 나는 늑대 새끼였을까
그때 암스트롱이 달에서 손을 흔들었다
슈메이커-레비는 흰 눈썹 같았다
눈썹 한 올 하늘에 심어두고 흰 눈물 흘리면서 그는 말해싸
홀로 있는 자 사죄하리라 결국 하나가 되리라 한 덩어리 비애가 되리라

그가 입을 다물자
하늘의 눈썹 같은 새 나에게 왔다

나는 기원했다
내 몸에 둥지 틀고
알을 낳아다오 검은 새여
사이프러스 언덕 넘어 밀밭을 휘감는 바람 밑에서
나는 무릎 꿇고 기도했다

(save me)

양질의 상품이 필요해요 불태환지폐는 소용없어요
목덜미를 꽉 물어줘요 바람의 턱에 돋은 수염처럼
내 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불꽃이여

(kill me)

황혼에 물든 저녁 연기, 가을비, 논 가운데의 허수아비
이 모든 이미지들의 가치를 교환해줘
예순아홉번 소멸된 후에, 선라이즈 선셋, 또 하루 지나가는데

(forgive me)

입속의 손가락이여
바람을 맛봐라
내 몸에 뿌리내린 그의 지문을 더듬어라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되어
텁텁한 숨결로 종말을 맞이한 나의 애인이여
나는 볼 수 있으나 내 눈은 볼 수 없고
볼 수 있으나 나는 어두워
입속의 손가락은 피 흘리는데......

옛날에 나는 한열이를 위해 혈서 썼고
불사파는 형님을 위해 단지했다네
단지 했을 뿐이라네, 단지 해 있을 뿐이었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단지 소멸할 뿐이라네
사랑뿐이네

69년에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는 나를 만들기 위해 어떤 운명을 결탁했나
나는 모종의 비리 아닌가 나는 음험한 계약 아닌가
너에게 나를 주마 이리로 오라
누워 입을 벌리라
달 뜰 때 내가 보이리라

69년 5월에 암스트롱은 고중력 실험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호텔 캘리포니아에는 69년의 핏빛 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
38구경 권총, 러시안 룰렛
한 발의 총알이 바로 나였다

양막을 뚫고
탄두에 피를 묻히고 날아가는 은빛 총알

탄착점에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일기ㅡ나를 전달해줄, 나를 실어갈 콘베이어 벨트. 거리에 그대의 냄새. 광교 건너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 때, 수갑과 올가미는 도처에서 나를 노린다. 그대가 쇠붙이라면 나는 숫돌이 되겠다.

그를 증오한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일기ㅡ나를 구해줘요. 그대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므로, 잠시 후이 적막을 위해, 이제 문을 닫아줘요. 성동구 송정동과 성수동의 경계를 비추는 새벽 2시 40분의 가로등. 나는 곧 잊혀질 테지만, 성동 소방서 송정 지소의 불빛이 그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그대의 배면으로 스며드는 것,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사랑이 끝난 뒤, 날 위해 빛나던 그도 빛을 잃어버리겠지. 새벽 2시 40분의 가로등은 꺼지겠지. 당직 서는 젊은 소방교의 하품. 성동구 송정동과 성수동의 경계를 비추는 새벽 2시 40분의 가로등.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불빛, 2시 40분의 불빛. 나를 점령하고 있는 환한 악마여.

그대가 나를 순식간에 죽이리라

목적 없는 목적성이여
작고 애달픈 나의 연인이여
눈구멍에 내려앉는 나비여
흙과 번들번들한 살갗에서 시작된 나의 아름다운 날들이여

저주 받으리 한 마리 도마뱀에게 위로 받으리

개좆 같은 추억, 진보하는 과거, 진보하는 상처와 함께

 

 

 

아나키스트들에게 정치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 즉 국가의 없어짐을 바라기 때문이다. 자꾸만 언급해서 죄송하지만(...) 최근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느 팟캐스트 방송에서는 아나키스트가 자연으로의 회귀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놓고 아나키스트라는 제목을 시집에 내걸고 있는 이 시에서는 도심이 만발한 국가 속에서 선심 쓰듯 피어나는 초록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꽃대 속에 피어나는 무수한 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는 권혁웅의 제법 훌륭한 시평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다지 고독을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마초들의 세계에서 남자들간의 사랑을 주장하는, 뚱딴지같다 못해 '주먹을 부르는' 다소 도전적인 인간이다. 그의 사상을, 그의 시를 비웃는 많은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얼마나 달관했으면 두 남자 간의 주먹다짐 싸움을 사랑의 체위로 만들어 매우 새로운 BL 시를 창조해냈겠는가. 그러나 진보와 간단히 공동체로 맺어지는 결말 또한 그가 바라는 바는 아닌 듯하다. 그는 자연으로 쉽게 돌아가버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도리어 시간을 돌려버리고 싶어한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허공으로 날아서 다시 본래 있던 나무에 붙고, 죽었던 사람이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살아가고,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포말로 기화하여 소멸하기를 원한다. 어쩌면 아나키스트일지도 모르는 이 시인도 자신의 소망이 이룰 수 없는, 혹은 먼 훗날 시인의 사망 이후에 이루어질 꿈임을 알고 있으리라.

 

 

또다시 낙타라는 시로, 시집 안에 들어있는 니체를 만났다.

 

 타클라마칸에 내리는 눈에서도 낙타가 다시 한 번 주요 등장인물로 출현하는데, 이 두 시가 이 시집 안의 시 중에서 유머가 가장 넘치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 군데군데 들어있는 섹드립도 주목할 만하다. 마리아와 SM과 술 푸는 기생을 제법 멋드러지게 연관시켜 놓았다.

 

 

우리나라 노래의 텍스트를 풀어헤쳐서 마치 매드무비처럼 늘어놓은 건 독특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출중한 섹드립에 감탄했을 뿐, 그의 풍부한 음악 지식에 감탄하진 못했다. 솔직히 시인의 나이 정도가 아니면 그닥 공감할 수 없는 음악가들이 많았다. 김추자라거나 인순이라거나 조용필이라거나. 유일하게 공감가는 게 '낙타하면 카멜이라는 담배와 캐멀이라는 밴드가 생각난다'라는 한 마디 정도였으니. 게다가 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라는 시에선 로쟈 분이 미리 서평에 쓰신대로, 마지막에 촌철살인의 한 줄을 더 집어넣어야 했었다. 겁이 많았던 건지 전반적으로 시인이 추진력이 부족했던지.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게 아나키스트의 한계라고 본다.

 

 

초반부터 아주 격렬하게 근육 넘치는 건축계 노동자나 술에 취한 남자들 간의 BL을 찬양을 하시기에 이 시에 나오는 유일한 애니메이션과 메텔은 강력한 위화감까지 준다(...)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 중에서

1
크레모아 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용기.
우리의 만남. 부자연스러운 행위. 시와 혁명.
술과 사상. 노동자와 시인.
우리와 그들의 사랑은 소도미야.
소돔 성이 소도미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어.
사랑의 힘 때문이야. 서풍이 분다.

혁명이 뭐겠어. 우리 결혼할래.
헬로와 헬로와 꽃들이, 헬로와 헬로와 우리들에게,
청첩을 돌린다면. 너와 나의 결합.
오래된 진리와 형체 없는 유행의 결합.

내 삶은 recycled life. 폐기해줘. 철폐해줘.
모든 법칙들을, 모든 용기를, 사랑의 만용을.
질풍노도의 시대. 그 시대의 아들이.
헤이 걸. 큰 젖을 가진 아가씨. 날 위해 울어줘.
이봐. 웨이트리스. 천 하나 더.

지하철공사 노동자들. 술을 마시고 있어.
파업 철도. 강철의 힘이란 옛날의 추억이라구.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아름다운 여인 메텔.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 역에 멈춰서면
차량 기지엔 햇빛이 가득했네.
투쟁하는 노동자의 눈동자
그런 시대. 그런 아득한 날들 앞에
항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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