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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설명하다

예를 들어 기술학교에 다니는 사촌이라면 비디오 신호가 어떻게 디지털 방식으로 입력되며 마그네틱 디스크 표면에 어떻게 녹화되는지 등등을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 사촌은 사실 할머니에게 설명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지식을 과시했을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할머니가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녹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할머니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똑똑한 척할 필요는 없다.

 

 

 

애니에서던 소설에서던 드라마에서건 영화에서건 주인공은 싸우고 있는데 곁에서 신나게 설명한다던가, 갑자기 판타지 세계에 빠져 어리둥절해 있는 주인공에게 세계관을 설명해주는 인물이 꼭 한 명씩 있다. 이런 인물을 설명충이고도 부르지만, 심한 말로는 아가리 파이터(...)라고 한다.

 

 후자는 주인공은 신나게 두들겨 맞는데 왠지 (의도한 건 물론 아니겠지만) 신이 나서 장단에 맞춰 저건 저먼 스플렉스라는 둥 떠들썩하게 꺄꺄 떠드는 좀 정도가 심한 아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독자들도 당황할 만한 급전개가 펼쳐질 때라거나 저자가 작품의 내용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지 않으려면 반드시 설명충이 필요하다. 만일 죠죠 1부에서 디오가 얼마나 힘쎄고 악랄한지 스피드웨건이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를 조금 불쌍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천하의 디오도 어린 시절엔 술만 처먹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었다.) 그에게 부여하는 권력의 힘이 어느 정도 약해져서 3부가 나올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판타지 소설은 설명충 캐릭터가 꼭 나와야 사건이 진행된다. 인간의 집중력엔 한계가 있고 모든 걸 나레이션으로 일일히 보여주는 데엔 한계가 있다. K 애니메이션이 처음에 욕을 무지 먹었던 이유가 세계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인데, 판타지 장르인데도 캐릭터 중에 설명충이 없기 때문이었다. 뭐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설명충 캐릭터가 없는 이유가 밝혀지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이 애니는 지금도 망작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으리라.

 

 

이런 캐릭터들도 결국 라스트 보스가 나타난다거나 어마어마한 반전이 전개된다거나 주인공이 사랑에 빠졌을 땐 그 자리에 없거나 이미 죽었거나 자리를 슬쩍 피해준다.

 

 

 스피드웨건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설명충 캐릭터를 풍자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그래서 다소 과한 면이 있는데, 그도 어떤 장면에서는 설명을 포기하기도 한다. 설명을 하기 싫을만큼 느끼는 감정의 폭이 클 수도 있고, 혹은 상대가 설명을 듣기 싫기 때문에(이럴 때 상대방이 정말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기는 한다.) 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이 책이 놓친 포인트가 있는데, 정말 쓸데없는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쓰레기 같은 물건이 중요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믿는(혹은 믿고 싶은) 사람이 경험을 모으느라 시간 낭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설명을 듣는 걸 포기하라고 설명을 해야 할 판이다. 아니, 이 책이 사실 그런 책인가? 이 짤방의 주인공이자 최고의 설명충으로 유명한 스피드웨건은 설명할 상황이 아닐 땐 설명하지 않는 신사이자 현자다. 하지만 그는 재단을 세우는 부자는 되었어도 평생 동정으로 살다 죽었다. 왜 저자가 엑스트라라도 스피드웨건에게 짝을 만들어주지 않았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결국은 말보다는 행동을 더 많이 하며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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