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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자 이제 아셨지요,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럼 지우면 되지 않아. 싫은가?"
"좋아요, 이야기할 곳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사르트르가 철들 무렵을 쓰던 시기의 프랑스에서 낙태는 불법이었다.

 

 

 

상당히 오래 전의 이야기인데도 혁명적이란 느낌이 든다. 단지 여전히 사르트르보단 보부아르가 더 매여 있었다는 느낌이다.

 

 

물론 사르트르나 보부아르나 다수의 애인을 만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 말고 다른 신체 건장한 애인을 만나 육체적 사랑을 나누자마자 그 재미에 홀랑 빠져서 그와 속세(?)의 결혼을 하고 싶다고 주장했었다. 나중엔 다시 사르트르에게 돌아오지만, 그 행동도 사르트르의 철학을 완전히 이해해서 자신의 이념을 흡수하도록(이념에 흡수시키는 게 아니라) 바치려는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걸 보면 보부아르의 사상은 역시 낡았다고 본다. 이미 보부아르의 페미니즘 사상은 옛날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페미니즘을 급진 페미니즘이라 부르는 이유에 대한 참고사항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보부아르는 결국 사르트르에게 자신의 성 경험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사르트르와 그렇게 하자고 계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애인들을 질투하는 성향까지 보였다. 특히 30대에 접어들고 사르트르가 젊은 러시아 여자를 만났을 땐 심한 위기감을 느낀 듯하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여자를 사귀고 성생활을 즐기는 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보부아르를 속박한 건 그 자신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 진보해도 소용이 없다. 어차피 사회의 시선이 그녀에게 폭력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상, 계약결혼을 유지하는 자신의 삶이 옳다는 진리를 사회의 시선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그 정도로 용기가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급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다. 발렌타인 데이 때 남성 대다수는 직접 만든 초콜릿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도 전애인에게 직접 만든 초코스틱(실패작)을 받은 적은 있으니, 그 정성으로 받는 감동은 안다. 그 정도로 넘어가면 되는데, 사람들은 '여기 댓글에 여성들이 너네가 만들어 먹으라고 난리를 칠 것이다' 라는 댓글을 먼저 단다. 특히 동성의 젊은 여성이 그럴 때 나는 굉장히 놀랍고 실망스럽다. 물론 그런 분들은 '자신은 강하다,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이런 식으로 어필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단 그런 글을 보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부류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자신이 피해자가 되거나 너무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해질 때, 그 사람들은 당신을 친구로 받아들일까? 대뜸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고 놀리면? 피해받은 게 너무 억울해서 가해자를 고소하겠다고 한다면? 최근 젊은 여성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싫어한다던가 고은 시인 규탄에 항변하는 건, 결국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약자가 약자에게 돌을 던지는 짓이다. 보부아르는 계약결혼으로 자신이 일반 여성들과는 다르게 산다는 걸 페미니즘적으로 주장하고 싶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매혹적인 글은 보부아르의 글보단,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주장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지극히 페미니즘적 글인 '자기만의 방'이다. 결국 하나하나 설득하여 모두가 변할 때 세상의 변혁은 가능하다. 나는 키보드워리어를 하기 싫어서 조용히 페친을 끊었지만. 이 행위도 결국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키보드워리어를 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것도 하나의 틀을 깨려는 싸움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의 규칙(그것도 자세히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까지는 매우 좋았다고 본다. 특히 모든 것을 다 말하되 다른 애인을 사귈 수 있다는, 서로가 초인적인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심지어 어찌보면 상충되기까지 한 그 두 조약의 조화가 좋았다. 언뜻 보면 인류가 인류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변광배 씨가 썼다고 하는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삶을 잘 요약했으며, 계약결혼의 핵심을 잘 요약했다고 본다. 특히 작품으로 작가들 각자의 사랑에 관한 생각을 설명했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대체 그녀는 그 안경 낀 남자를 어떻게 참고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쇳소리의 포주 같은 목소리하며, 쭈글쭈글한 파란색 정장, 게와 동성애자들과 나무뿌리와 존재의 질척한 더러움과 하이데거스러운 짬뽕 철학에 집착하던 그 남자를.

첫째, 외모 별로 따지지 않는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 아예 배가 나온 남자를 좋아하는 여성들(진심 외모만으로)도 있다.
둘째, 책에서도 적혀 있지만 보부아르는 사르트르보다도 더 패션감각이 좋지 않다. 가뜩이나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르트르는 오히려 여자친구가 잘 차려입지 않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수도 있다.
뭐든지 커플 중 여성쪽이 남성보다 더 참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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