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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스포츠이며 오락인 동시에 승부의 전장인 당구라는 분야에는 밀고 끌고 빨고 돌리고 벗기고 먹이고 회전시키는 등등,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얼마간 색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무수한 언어적 표현과 함께 한탄과 억울함과 바람과 행운과 불운, 애원, 기쁨, 비탄에 어울리는 각양각색의 몸짓과 비명과 감탄과 호소의 표출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는 늘, 신기할 정도로 과묵하고 무표정했다. 인간의 희로애락 오욕칠정을 나타내는 표정에도 등급이 있다면 가장 높은 등급은 바로 그런 무표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꽤 책 이름을 오인했던 적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바흐친과 문학 이론은 바흐친의 문학 이론과 꽤 비슷해보인다. 그처럼 이 책의 이름도 '번쩍하는'이란 대목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번쩍하는과 '번쩍였던'은 상당한 차이가 있어보인다. 각각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니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슬슬 꼰대가 되어 과거가 좋았더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 약간 겁이 났다. 그래서 명문장을 달 때 제목을 헷갈리지 않도록 상당히 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 명문장을 달 때 테마로 삼으려 했던 게 정치와 술인데, 최소 10장당 한번씩은 꼭 등장하는 주제였다. 자동으로(?) 현재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이번 소설은 뺑덕 어멈이 등장하는 판소리를 방불케 하는 긴 넋두리들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라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주제도 뭔가 모나고 못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쁜 사람들임을 알면서도 가끔 그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다거나, 심지어 귀엽다고 생각되는 건 어째서일까.

내가 사는 동네에서 진행했던 성석제 작가의 토크쇼에 대해서 에피소드를 하나 더 이야기 하겠다. 진행자가 복숭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알차게 묘사한 어느 작가가 있다고 하며 그녀를 극찬한 대목이 있었다. 성석제 작가는 대뜸 자신도 복숭아에 대해서 소설을 썼으며 그 외에 딸기와 자두 등 다양한 과일을 취급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읽어보니 복숭아를 먹는 장면을 감각적으로 썼다기보단, 언어유희를 맛깔나게 구사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신 듯하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에게 뒤늦게 발견되어 '아재 유머'라는 이름이 붙여졌기에 망정이지, 예전에 언어유희를 즐겨 하는 사람들은 더 심한 천대를 받았었다. 그래서 더욱 귀한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교관은 궁리 끝에 후보생들의 옷을 모두 벗게 한 다음, 비 오는 연병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각각 자기 앞사람의 성기를 잡고 줄을 지어 달리게 했다. ('군대는 줄이다'라는 관용어도 있다.) 그것은 하늘이 사람을 지상에 살게 한 이후 처음 나타난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때부터 'X 잡고 반성한다'는 말이 생겼다.

 

 

 

 

그래서 원래 그 ㅈ은 남의 ㅈ이라는군. 역시 군대는 BL소설 쓰기 좋은 무대야.

 

 진짜 동성애자가 지은 반실화라는 소설에도 나오고 이미 영화도 나왔지만... "그게. . .어떻게? 뒷사람이면 좀 나은데. . .앞사람걸 잡고 가려면 간격이 . . .??"라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근데 성석제 씨는 소설에서 그랬듯이 하면 된다, 라고 대답하실 듯하다.

 

12월 24일. 나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제주도에 있었다. (하긴 지금도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혼자였고 전날 마신 술로 머리가 띵한 상태였다. (...) 하긴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돈을 주고 표를 사서 산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악착같이 개구멍으로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지리산 국립공원, 설악산 국립공원이 나한테 수없이 당했다.

 

 

술은 역시 혼술.
등산길은 역시 동물길.

 

두 사람은 취해 있다. 아니 취하고는 배기지 못하리. 관동팔경 죽서루 난간 위.

 

 

 

나는 누각에서 술을 마시는 노인분들을 보진 못했지만 이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버스에서 술을 얼큰히 마신 듯한 노인들은 본 적이 있다. 청춘남녀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장소가 카페나 술집인 게 별다른 이유가 있겠나. 관동팔경은 인생 멋대로 사시는 노인분들이 즐기시고 계신다. 가끔 떨어지고 싶은 듯이 벼랑을 쳐다보며.

 

P.S 왠지 이 명문장이 나온 소설의 주제와 비슷할 거 같아서 올려본 강릉 바다부채길 리뷰.
1. 길 좁으니까 사진찍지 마라.
2. 길 좁으니까 양산펴지 마라. 양산으로 때릴 것이다.
3. 여기서까지 술쳐먹고 들어오지 마라.
4. 총 맞기 전에 울타리 넘어서 바다 들어가서 낚시하지 마라.
5. 고소공포증 있으면 오지 마라. 바닥 비치는 곳 많음.
6. 우산 펴지 말라고 시뻘들아!!!!!!
7. 왜 바다에서 술판이야! 김정은 오빠!! 오디계세여!! 쟤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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