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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ociety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묘. 역모죄로 능지처참된 후 7일간 효수되어 있었던 까닭에 제대로 장사 지낼 수는 없었으리라. 남이가 실제 이곳에 묻혔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이곳에 남이 장군의 묘로 조성해놓았다. 춘천 남이섬에도 남이가 묻혀 있다는 전설을 가진 돌무더기가 있었다.

 

 

페이트로 비유하자면 남이는 라이더가 아니었을까. 백성들은 좀더 날뛰고(?) 장군다운 남이를 좋아했을 듯하다.

 

구성군 이준이란 사람은 신중한 성격이라고 하지만 왠지 아버지에게 눌려 살았던 것 때문에 조심하는 게 과하다고 할까. 정치가 기질은 있어도 장군다운 기색은 없었던 것 같다.

책에서는 남이의 일이 구공신의 함정이라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왕이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했거나 적어도 구공신과 왕의 합작품일 거란 의견이 주도적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개정판도 수정을 안 한 듯하다. KBS 역사를 찾아서 참조.

 

세조가 대군이었을 때, 후첩으로 들어와 자식까지 낳은 덕중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세조 즉위 후 소용에 봉해지기도 했으나 낳은 아이는 죽었고 세조의 관심 또한 멀어졌다. 아직 뜨거운 젊음을 가진 그녀, 어느 날 문틈으로 바라본 구성군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적극적인 그녀는 절절한 연애편지를 썼다. 편지를 받아본 구성군은 기겁했고 부랴부랴 아버지와 함께 입궐하여 그 편지를 내놓았다. 구성군다운 처신이었다.

 

 

어떤 사람이 도쿄구울에서 얻은 교훈은 '여자 잘 만나야 한다'라더라. 그럼 여기서 얻을 교훈은 '남자 잘 가려서 반해야 한다'냐? ㅋㅋ

 

예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이를 좌천시켜버리는데 이날은 바로 예종이 즉위한 당일이었다. (...) 임금과 원상들로부터 주시받고 있는 상황인데 서둘러 측근들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 남이가 끌어들이려 애쓴 인물 중에 유자광이 있다. 서자 출신인 까닭에 벼슬길이 막힌 유자광은 처지를 비관하곤 건달 생활로 소일했다. 내기 바둑, 내기 장기, 아녀자 희롱.......

 

 

5권 리뷰 쓸 때에도 얘기했지만 여기에서도 은근 이어지는 세조 찬양 ㅋㅋ 서자를 채용한 건 훌륭한 일이지만 단순히 그의 처신을 높이 샀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유망한 신진 그룹의 한 사람으로 잘 나가다 다음의 일로 세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세조 10년, 세조는 잡학을 7개 분야로 나누고는 각 분야에 문사 6명씩을 두어 연구하도록 했다. 김종직도 그 중 한 분야인 시사에 배속되었는데 윤대에서 이 정책을 비판한 것.

 

 

유교니깐 ㅋ 아무리 세조가 중앙집권하려고 했어도 저 때도 신하들 중심이었나보다. 저렇게 면전에서 바른대로 말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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