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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ce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뭘 보세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녀를 깨우지 말고 다시 재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녀의 생각 속에서 새로운 꿈의 씨앗을 낳게 할 만한 단어로 대답하려고 애썼다.
"별을 보고 있어." 하고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당신은 별을 보고 있지 않아요. 당신은 땅바닥을 보고 있어요."
"비행기에 타고 있으니 별이 우리 아래에 있지."
"아, 그런가요?" 하고 테레사가 말했다.

 

 

 

 

 일단 이 책은 전부 무겁다. 가벼움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가벼움을 자유연애에서 찾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목숨걸고 여자를 찾는 토마스가 목줄 묶인 개처럼 보이냐. 차라리 아내 따로 여학생 애인 따로 둔 프란츠가 훨씬 자유로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사비나라는 여성 빼면 대체로 마음대로 집어치우고 집을 나설 수가 없는 상류층 이야기라서 분위기가 무거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그 사비나도 우울증에 걸려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 생각으로는 아내 테레사가 겁나 마음대로 휘두르는 토마스를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님 마음 속 깊은 곳으론 그들의 심각한 사랑이 부러워서 그런 애정을 애인 프란츠에게서 찾으려 했는지도. 아무튼 운동권의 그 복잡한 사랑 이야기 생각나고 재밌다. 토마스는 여자랑 섹스를 하면서 그녀에게서 백만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자아를 발견한다고 한데, 아무래도 그 이론이 운동권 마초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생물심리학을 보자. 씨를 광활하게 뿌리려는 게 수컷이라 함으로서 토마스의 이론이 완벽한 개소리라는 게 입증된다. 생각해보면 과학의 발전도 어느 정도 세상에 도움이 된다. 지가 절제를 못해서 테레사가 저렇게 고통을 받는 걸 보고,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낀다면 아예 무성애자로 사는 게 나을텐데. 결국 테레사의 호기심으로 인해 사건이 커지면서 소설의 재미도 더욱 커진다.

 자유연애 자체로 보면 진짜 여자가 손해보기 딱 좋은 듯. 이 소설에서도 관계의 결실(혹은 현실과 연관된 귀찮은 존재)이라 볼 수 있는 애는 등장도 안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를 하면 다 여자가 책임을 져야 하고, 안 하면 여자가 혼자 정절을 지켜야 하고 아무튼 다 여자가 불리하지 않은가. 남자들은 좋은 여자 잡았으면 한눈 팔지 마라...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렇다고 급진 페미니즘으로 가면 어떻게 되느냐? 테레사가 된다. 일단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남자를 닮기 위해 바람을 폈다지만, 결과는 미러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인해 마초들이 주장하는 '성적 이분법'은 남게 되는 것이다. 거울에 비춰서 좌우를 반대로 바꿔도 일단 대상은 같기 때문에. 그런데 여자는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간에 남자와는 다르기 때문에 남자가 바람필 때 느끼는 그 감정을 겪을 수 없다. 이 책은 피해자중심주의에 빠진 급진 페미니즘의 치명적인 단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토마스가 바람을 피는 이유에 대해 온갖 변명을 하듯이 그녀도 온갖 변명을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결국 결혼의 붕괴와 죽음이었다. 급진 페미니즘 또한 그렇다고 난 생각한다. 그들이 펼치는 시위도 '검은 시위'이지 않은가. 물론 지금 젠더라는 개념이 나왔지만 이 책에선 시대가 시대니만큼 아직 미숙하고.

 

 

많이 힘들지만, 절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개와 인간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다 생각된다면, 심지어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용서못할 건 없다고 생각된다. 법의 심판을 얌전히 받는다는 가정 하에. 하얀 거짓말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건 마치 투표를 아예 안 하고 침묵하는 게 자신의 소신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냥 가만히 넘어가도 될만한 것들이 산적해있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왜 남이 나에게 저지른 부당한 일에 대해선 침묵하지 못하는가. 역겨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해는 하지만 나는 특히 남성이 여성을 성추행한 후 여성이 그것을 SNS같은 데다가 퍼뜨리는 경우를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나도 한때 누군가의 추문을 그런 식으로 퍼뜨린 적이 있지만, 그래봤자 상대방은 나를 더 싫어하게 될 뿐이며 나는 미묘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해결법은 사실 간단하다. 그냥 상대방의 키치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나와 키치가 맞다고 생각되는, 혹은 착각되어지는 사람을 찾아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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