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m&Essay

웃기는 짬뽕

건달

안경 유리에
날파리
앉았다

무심코
마우스를 대고
클릭했다

눈앞에
빈 하늘 하나
뜬다

 


 


 


시는 짧은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다.


난해한 시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이런 시들엔 굉장히 열광하는 편이다. 그냥 뭔지 몰라도 분위기는 좋다고 할까. 나이든 시인들이 제일 다루기 어려워하는 주제가 컴퓨터와 인터넷인데 이 시는 딱히 제목으로 주제를 나타내지 않아도 명확하고 깔끔하게 쓰여졌다고 본다.



 


사실 난 웃음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유머 감각도 없고, 펑펑 울 수 있는 책을 좋아하며, 개인적으로 아무 이유없이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웃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물론 조용하지 않은 아이들을 가장 싫어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주변에서 계속 웃어왔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아무데서나 쿠당탕 넘어지는, 춤도 못추고 노래도 못 부르는 나였다. 어린 시절엔 만성 축농증까지 있었다. 아이들은 재밌었을지 모르나 나는 계속 이비인후과에 다녀야 했다. 아니 그들이 정말 뜻도 모르고 재미있어했을까? 아이들도 알 건 다 안다. 자신들은 축농증에 걸려본 적 없다며, 물건을 그렇게 자주 잃어버리지 않는다며, 그들은 재미있어했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를 냈다. 어느새 나는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이후 사회관계를 맺는데 엄청난 고생을 치렀다. 결국 그 웃음을 웃음으로 받아넘길 수 있는 사람이 인간관계를 무난히 살아갈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연습해보자. 그래? 내가 백치미가 있다고? 하하하 그렇지 백치미 하하ㅎ뭐 이새꺄? (밥상 엎기)

웃음이 많은 사람, 웃음이 없는 사람. 정말 착한 사람, 쓰레기 같은 사람. 화를 잘 참는 사람, 매일 화만 내는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 울음이 없고 차가운 사람. 내가 들어온 말들이다.
내가 웃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웃는 적은 몇 번이 될까.
유튜브든, 페이스북이든, 어느 미디어에서든지 '재미있는' 소재를 찾고, 사람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는 자들이 성공한다. (나는 비록 웃지 못하지만.)
지친 일상 속에서 그들은 잠시나마 인생에 여유를 주니까.
나 또한 그러하다.
나는 보여주는 웃음이 상당히 무섭다. 두렵다. 나 또한 보여주는 웃음을 주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그렇지 말라는 법 있을까. 겉으로는 나로 하여금 착하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찌할까. 나는 그래서 인간관계가 참으로 두렵고, 거의 이것을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런 생각을 근근히 하는 도중 나에게 또한 비슷한 몇 개의 수식어가 더 추가되었다. "웃음이 없는 사람", "유머감각 없는 사람", "웃기는 책 보다는 울 수 있는 책들을 자주 읽는 사람"
박지원의 <통곡할 만한 자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 볼 만 하구나."
정 진사는, "이 천지간에 이런 넓은 안계(眼界)를 만나 홀연 울고 싶다니 그 무슨 말씀이오?"
그러기에 그는, "희로애락애오욕 칠정 중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뭐가 다르리오"
어느새 제대로 웃은지도, 제대로 울은지도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에 녹아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한참을 울어왔던 그 시간들은, 꼭 슬퍼서 그랬던 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있다.
내가 개그프로를 보는 이유, 슬픈 문학을 보는 이유, 사람마다 정 반대의 수식어가 붙은 이유.
나는 행복하게 '웃고' 싶었던 것이 아닌, 행복하게 '울고' 싶었던 것인가.
다만 숱한 슬픔에 떨어진 눈물들을 감추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거짓된 웃음을 만들어낸 삐에로. (요즘에는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어릴 때 더 심각했던 건 아재개그에만 반응이 왔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권력에 편승하려던 마음이 그 어느때보다 강했던 게 초딩 때였지. 아마 그때는 공무원 시험보면 붙었을거야... 아재개그는 원래 권력이 있는 아재가 썰렁한 농담 던진 후 웃으라고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이었으니까.


이 시집에서는 여성의 성폭력에 관련된 시가 둘 있다. 비유적이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건드리면 데일 걸 알면서도 왜 자꾸 건드리는 걸까. 다치면 욕할거면서 그런 걸 꼭 건드리려 하는 심리라도 있는걸까. 친구들과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영심이란 애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 내가 영심이 같다며 비웃은 적이 있다. 지금 해석해보면 영심이는 일종의 은따이다. 이들은 그 의미를 알면서 그렇게 말했을까? 대다수들은 알았다고 본다. 내 자신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게 죄일까 아님 어떤 사람의 상태를 알면서도 발기발기 찢어서 기어이 씹어 먹으려고 하는 게 죄일까? 어느 쪽이 더 죄가 클까?




항상 이런 시들이 아쉬운 이유가 뭐냐면, 이런 메시지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물론 스토킹은 제목만으로도 상당히 노골적으로 페미니즘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차피 해석에 따라 달라지면 그뿐인 내용들이기 때문에 위험성이 없어지고 싱겁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들이 비교적 안정적이기는 하나, 너무 안정적이어서 정작 박그네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이슈가 뜰 때엔 활용되지 못하고 묻혀버린다. 맨날 팟캐스트 나오면 시인이 나그네라는 시를 무지 잘 활용하긴 하던데, 그것도 팟빵을 듣는 사람들이나 소비하는 거지.. 쩝. 그냥 아쉽다고.

'Poem&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빠를 딱 하루만  (0) 2018.03.02
집은 아직 따뜻하다  (0) 2018.03.01
  (0) 2018.02.23
천국보다 낯선  (0) 2018.02.17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0) 2018.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