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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질의응답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뭐 친구끼리의 사소한 싸움 가지고 진심 정색하고 있는 나도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나로선 내가 싫은데도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는 그 인간들이 싫은 것이다.


 내가 술주정을 하고 난 다음날 아침 치마 좀 입고 나오면 어김없이 '이야 아가씨가 어제와는 완전 딴판인 모습으로 나오네'라며 비웃는 모습을 한다거나. 나랑 친구하기 싫으면 다른 애랑 잠깐 친구하다 오거나 혹은 안 와도 그만이지 않을까. 술주정에 정말로 화가 났으면 아예 얼굴도 보지 않고 집으로 가고 그걸로 끝, 이었으면 서로 무안하지 않고 나만 무안한 일 아니었을까. 이렇게 '실수'하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나 자신보다는 인간관계 자체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라는 사람 자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그러다가 자신의 심정마저 잊어먹은 채 그저 예의를 차리기에 바빴던 게 아니었을까. 그 인간의 대소사가 역사에 비해 도대체 뭐가 중요해서? 그 시간에 차라리 지금도 고통받고 시위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가는 게 훨씬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뭐 어차피 이런 글을 쓴들 이미 내가 단호박으로 잘라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보긴 어렵겠지만.

이 시인의 시는 굉장히 좋은 시와 그냥 좋은 시의 차이가 분명한 편이다. 특히 사회이슈에 관해 다룬 시들이 가장 좋은 듯. 섬세한 감각이 느껴지지만 미래파라 불리기엔 주제 의식이 선명한 편이다.

 

정말 간단히 말하자면 이 시집의 전체적인 주제는 '개썅마이웨이'이긴 한데, 동화책으로 만들어도 될 만한 아기자기한 단어들로 이를 순화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스토리가 있는 시는 인디언 텐트와 생일 편지 둘밖에 없고 나머지는 너무 단편적이라서 일러스트(?) 정도의 인상만 남는다. 시인이 시를 좀 길게 쓸 때 좋은 면이 있고 짧게 쓸 때 좋은 면이 있는데, 이 시인은 좀 더 길게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른 시인들보다 길게 쓰는 편인데도 그렇다. 사람들이 우울한 시 좀 쓰지 마라 등등의 잔소리를 하나본데, 다음에 시를 쓰실 땐 그런 걸 무시했음 좋겠다. 안미옥 시인 자신이 떨쳐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긴 한데, 아직 부족하다.

의외로 연애시같은 것도 있다. 한 사람이 있는 정오라는 시인데 대다수의 다른 시들처럼 한 쪽 이상이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너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자신은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상깊은 대목은 될 수 없었다. 나는 나일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 말로도 눈물이 펑펑 쏟아졌을 텐데 감각이 둔해진 건지, 아님 나이가 들어서 꿈보단 현실에 더 가까워진 건지 알 수 없다. 좋지는 않은 현상인데.

여러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미옥의 시를 고평가하는 건 당연 그녀의 역대작이라 할 수 있는 시 질의응답 때문이다. 이 시집은 또한 완성도도 뛰어나다. 주어도 목적어도 흐릿해서 제법 고분고분한데 좀 지루할 정도다 싶을 때, 그러니까 이 시집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 시인은 반전을 때린다. 두번의 산책에서 시인은 이 시를 다시 읽을 것을 추천한다. 이를 무시하고 다음의 마지막 시로 나아갈 때, 여름의 발원이라 하는 그 시는 독자에게 '자신의 기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라 쓰여 있는 무자비한 딱지를 붙인다. 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인간은 드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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