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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ery&Horror

비자나무 숲

사실 생리란 여자 노릇이라기보다 여자 노릇의 실패한 흔적이지만 어쨌든 여자만이 실패할 수 있는 노릇이다.

 

 

 

 

뭐든지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곳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 걸 나는 제일 좋아한다. 그러길 잘했다고 불현듯 소름돋게 느끼는 때가 많다. 인간관계라던가 종교라던가 학교라던가 전애인이라던가.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목줄이 매여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일종의 발버둥을 치고 있는게 아닐까.

 난 해외여행을 하지 않는다.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이응준 씨가 소설로 호러 시를 썼다면 권여선 씨는 소설로 에세이를 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문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가슴에 큥 박히는? 그런 짧은 문장을 하나 내주고 스토리를 전개한다.

 가볍게 보면 좋긴 좋은데 이런 사람이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도 썼다니 도대체 어떻게 썼을지 감이 안 잡힌다. 처음 팔도기획에선 가볍고 약간 몽환적인 스토리로 접근하더니 은반지에서 갑자기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소녀의 기도로 갑자기 충격적인 고어를 쾅 때려버리더니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 잔잔한 추억같은 회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막 나가는 인물들과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인물들이 많이 그려져 있지만 소설가는 어디까지나 귀퉁이에서 이 둘을 관망하는 제3자 같은 느낌이다. 단편 소설집인데도 그런 화자를 최소 3명 이상은 본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해서 비린 맛은 죽어도 싫어하고, 조금만 주의가 흐트러지면 입술을 고집스럽게 꽉 깨물어버리며 조금도 상냥스러운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20대 후반의 소녀. 65년생이라는데 어쩜 이렇게 지금 시대의 청춘들 모습을 잘 담아냈는지 경탄스럽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질 줄 몰랐다. 아마 이 책이 쓰여지고 소설가가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시절을 하나하나 거론하기 시작했을 때, 동창들이 다소 놀라워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으니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담담히 꺼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남자들은 다 잡은 물고기가 있으면 도망갈 궁리밖에 하지 못하나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자신이 버림받는 건 몹시 싫어하고 남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데엔 예민한 주제에, 자신이 남을 나몰라라 내팽개치고 바람핀 데 대해서 무신경한 건 남녀 모두에게 포함되지만. 어딘가 떠나고 싶다고 지겹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판을 차려주면 끝내 가지 못한다. 기억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사람은 소나무가 될 수 없고 바다가 될 수 없고 꽃이 될 수 없다. 간신히 쥐새끼 신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다행일까.

 오랜만에 이번엔 소설 끝에 있는 평론을 읽지 않았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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