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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눈부신 자서전

발바리 중에서

낮에는 회사원 두 딸의 아빠

바둑알 놓듯 살아온 아빠

그런데 강간만 마흔다섯

가스 배관을 타고 들어가

아이의 엄마까지 강간했네

(...)

성질이 온순하고 모양이 예쁜,

효자였다고

자상한 아빠였다고

그날도 딸아이 유치원에 데려다 주려다 체포된 발바리...

(...)

아빠 아, 빠

아 씨발 씨발

제가 그 아이를 만나면

나를 사랑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요

내 가슴 쪽쪽 빨 때 뭐라고 해야 하나요

 

실비아 플라스 시 생각나기는 한데, 그래도 이 시가 짧고 핵심이 다 들어가 있어서 더 좋다.

 

대뜸 초반 시부터 구더기가 들끓고 있지만(...) 시집을 읽어보면 시인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얼마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저항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하기사 눈부신 자서전이라니,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라면 저렇게 이름을 지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기독교 초반기 신앙을 가진 자들의 수행을 보는 듯한 느낌이 자주 드는 것도 그가 올곧은 마음을 고수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란 생각이 든다. 종교심에 넘치는 시들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의 여러 일들에 무심한 것은 아니다. 특히 가식적이거나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해선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권투를 다룬 시 작품이 두 개나 있다. 시 쓰시는 거 보면 얌전하게 생기셨는데 상당히 의외랄까 ㅎㅎ

 

역전 주차장 입구 축산물 종합직판장 중에서

 

대전역 육교 아래 차들도 부르르 몸을 떨고

이런 날 집 없는 집비둘기

육교 상판 받치고 있는 기둥 그 아래 난간에서

균형 잃어 풋잠을 깨고 붉은 발을 동동 떼고

그 직판장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더군

느으끼인그대에로오를마알하고생가악한그대로오만우음지익이며

누구운가마알을해도도올아보지않으며내에가아가아고프은곳으로오가려어했지

얼굴이 잘려나간 돼지들 축축 늘어지고

그러어나너어르을아알게된후우사랑하게에된후우부터나아를두울러싸안모오든것이변해에가네나아의기일을가아기보오단너어와머무을고만씨입네나아를두울러싸안모오든것이변해에가네

새직장을 구한 지 일주일밖에 되질 않는데

돼지들은 말이 없고

왜 발목을 잡고 그러는 거야 너에 대해 특별히 쓸 말이 없단 말야

 

 

여러 동물들을 포함해 심지어 사물마저 배려해주는 시인의 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시가 많다. 그런 점에선 친환경과 자연 예찬에서 또 한층 벗어나 독특한 관점을 지닌 시집인 듯하다.

 

울 할아버지 중에서

 

9시 뉴스데스크를 끝으로

잠자리에 드셨지

캄캄한 밤중에 한 번은 깨시어

담배 한 개피 피시거나

두세 모금 냉수 드시었지

새벽이면 어느샌가

자전거에 삽을 걸거나 낫을 들고

논에 다녀오셨지

다녀오시면 샘가에서 낫을 갈거나

흙 묻은 장화 닦아내셨지

울 할아버지 평생을

목수로 농부로 살다가 돌아가셨지

흠 없이 돌아가셨지

그러나 마흔에 가까워지는 나는

여전히 흠으로 집을 만들고 있지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할아버지의 허브큐 사탕

할아버지의 대패질 소리

 

 

여러 동물들을 포함해 심지어 사물마저 배려해주는 시인의 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시가 많다. 그런 점에선 친환경과 자연 예찬에서 또 한층 벗어나 독특한 관점을 지닌 시집인 듯하다.

 

울 할아버지 중에서

 

9시 뉴스데스크를 끝으로

잠자리에 드셨지

캄캄한 밤중에 한 번은 깨시어

담배 한 개피 피시거나

두세 모금 냉수 드시었지

새벽이면 어느샌가

자전거에 삽을 걸거나 낫을 들고

논에 다녀오셨지

다녀오시면 샘가에서 낫을 갈거나

흙 묻은 장화 닦아내셨지

울 할아버지 평생을

목수로 농부로 살다가 돌아가셨지

흠 없이 돌아가셨지

그러나 마흔에 가까워지는 나는

여전히 흠으로 집을 만들고 있지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할아버지의 허브큐 사탕

할아버지의 대패질 소리

 

 

내가 요즘에 새벽에 일어난다고 하니까, 누가 그 상태로 집안일하면 층간소음 아니냐고 한다. 이 시골 마을에서도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게 '소음'이다. 내가 사람 없는 곳으로 이사하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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