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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푸른 눈의 목격자

 

당신이 가고 나서야 당신 이름을 렀다 목석보다 더 무뚝뚝했던 당신, 안부를 물으면 당신이 유행이 한창인 가요의 가사로 화답했고 어색한 기류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날 때면 유행 지난 가요로 배웅했다 눈 한번을 마주치는 일이 없었던 당신에게 닿는 일은 가장 먼 별을 향해 가는 여정만큼 여간 쉽지 않았다

 

옛 생각을 거닐듯 천천히 밤을 씹었다 알몸의 당신이 여러 갈래로 나뉜다 이제야 겨우 거리를 좁혔는데 한줌 재가 된 당신이 품에 들어온다 흩날리는 잿빛 눈에서 은단 향이 났다 내가 몰랐던 당신 냄새였던가 유달리 춥고 길었던 겨울밤이었다 차츰 멀어지는 당신

 

장례지도사가 말했다

다시 봄입니다

 

 

처음에는 짝사랑에 관한 시인줄 알았더니 후반을 읽어보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인 듯하다.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시가 대부분이고 일부 서정시가 섞였는데 난 그 중에서도 서정시가 좋더라. 쉬는 시간을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페친이 어느 시인의 명함을 받은 사진을 찍어 올렸기에 아무 생각 없이 시집을 사서 읽었는데 그 중에 미투란 제목의 시집이 있더라. 한 눈에 읽을 맛이 싹 가시게 하는 시였다. 대체 페친은 이 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분명 나와 같은 시집을 읽었을텐데 말이다. 내용은 사람들이 다들 누군가를 따라하는 사회에서 화자가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지 아쉬워하는 것으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성들의 미투와는 그닥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나는 어느 방송에서 '여성들 미투 따라해서 나도 당했다고 하다가 이 사회에서 얼굴 들고 살 수 있을지 걱정되요'라고 빈정대는 소리와 페이스북에서 '남성들도 비정규직으로 취직해 죽을동 살동 일하는데 페미들 왜 안 도와주요 광광'대는 글을 읽어서 이미 마음에 깊이 상처를 입은 상태라서 곧이곧대로 이 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해설을 읽어보니 인간다움이 없는 세상에 대한 비애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인간다움이라. 혁명한답시고 시위에 참여한 여자들을 성추행하고 여자들은 다 혁명을 위해서라고 나중에 말하자고 생각하며 참는게 인간다움일까?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개인주의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지금 이런 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든다. 시인이 이런 시를 쓰더러도 내가 이 시를 읽고 불편하더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여성들이 너도 나도 미투한다고 치부하기에 여성들의 상처는 너무 깊다. 그나저나 이 시도 결국 '어그로끌려고' 제목을 이렇게 지은 건 아닌가. 제목 덕분에 이렇게 인상에 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시 앞으로 몇 페이지 넘기면 '젖가슴'이란 비유가 또 등장한다. '한남들 정말 젖가슴 없이는 못 사는구나.'라는 어떤 페친의 대사를 따라해본다. 나도 남을 모방하고 있지만, 어쨌든 젖가슴 단어를 쓴 건 사실이지 않은가. 어차피 다른 남자 시인들도 너도 나도 시집에 젖가슴이란 단어를 쓰는 '젖가슴현상'이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욕 먹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어쩌다 글이 이렇게 써졌는데 화난 건 아니고 단지 기분이 언짢을 뿐이다. 시가 꼭 독자들 읽고 기분 좋아지라고 쓰는 건 아니라 본다. 주목을 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나에게는 매우 평가가 높다. 단지 이런 말을 하는 인간들이 내 주위에 너무 많을 뿐 ㅠㅠ 아무튼 미투로 시 올린 것도 그렇고 이 분은 시인 되자마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겠네.. 시인들 세계에서도 대세가 페미니즘인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저런대냐.

 

단지 미투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새 유행하는 '빚투'라는 표현 진짜 짜증난다. '미투'의 유사 신조어를 양산해내는 한국의 저질언론들의 자세에서 그들이 미투운동을 곧 지나길 하나의 유행쯤으로 여기고 있고 또 그렇게 소비되길 바라는 속셈이라는 게 너무 잘 느껴지니까. 채무불이행 피해 고발이 언제 당당하게 말하기 힘든 선언이었던 적이 있는가. 그런거 필요 없었지 그냥 고소 하면 되니까. 채무사기 피해 폭로자가 되려 꽃뱀 취급당하고 생계에 위협받을 일이라도 있었는가. 일자리에서 짤리고 2차가해 당하고 주위로부터 이제 그만하라고 저지당한 적이라도 있었나. 말장난이라도 재미없고 추잡하기만 하니 제발 그만 좀 엮어. 미투는 너도 나도 따라한다는 게 아니라 비열한 행위를 고발한다는 뜻이다. 용기내서 고발할 일도 아닌 것에 투 투 갖다 붙이는 거 그만하라고.

 

키덜트 중에서

 

설계도를 따라가다 보면 잃어버린 유년의

심장과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릴 적 내 꿈은 과학자였어 사탕과 함께

철인 메칸더 아톰 그랑죠 등의 주제가를 입에 달고 다니며

단내를 풍기며ㅡ엄마, 내가 만든 코드번호 OS010-I70 로봇을 타고

우주여행 갈 수 있어ㅡ떠들어 대고는 했어

 

설계도는 항상 머리부터 나를 이끌었어 몸통 없는 머리가 무슨 소용이야 그건 너무 시시한 일이지

살아 있는 머릴 원해

 

다리를 만들었을 때 계절은 여러 번 바뀐 뒤였고

팔을 겨우 완성했을 때 집의 각도는 기울어 있었어

머리를 만들다가 엄마의 그림자가 흐느끼는 걸 봤지

 

 

내가 좋아하는 그랑죠 나왔엌ㅋㅋ 역시 나하고 나이차가 1년밖에 안 나는구나 신기하다. 그나저나 이 분은 키덜트도 좀 공격하는 듯한 말투네(...) 키덜트는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오타쿠에 가깝긴 한데 역시 이 시인의 시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푸아그라 중에서

2

봉씨는 오늘도 시팍 피시방의 모니터에서 열심히 물갈퀴를 휘젓고 있습니다 그의 날개는 바람 소리만 낼 뿐 전혀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연신 시팍, 시팍거리는 그의 뭉뚝한 부리가 더욱 뭉뚝해집니다

(...)

핸드폰의 스피커에서는 우울한 음색과 도정되지 않은 욕설이 알맞은 비율로 배합됩니다ㅡ한심한 새끼 밥만 축내는 놈ㅡ독설을 간신히 소화해 낸 봉씨, 개구리 턱처럼 부푼 배가 가라앉을 줄을 모릅니다

 

3

얼큰히 술에 취한 봉씨가 핸드폰을 잡고 늘어집니다ㅡ내 날개는 장식품이 아니란 말이야(...) 바람 대신 지랄을 맞아도 정통으로 맞아 버렸다니까 염병할ㅡ혈액을 밀어낸 알콜이 봉씨를 서서히 잠식합니다

 

 

일단 게임이 무조건 좋다며 세뇌당한 인간들이 99.9%인데 딱 한 번 이런 류의 인간을 본 적이 있다. 게임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걸 안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계속 게임을 하다가 결국 연락두절되었는데 아무래도 게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하고만 카톡 주고받으며 사는 듯하다. 어린왕자에서 술 마시는 게 부끄럽다면서 계속 술 마시고 있는 술주정뱅이가 연상되었다.

그렇지만 잔소리할 거면 봉씨에게 돈 내고 하세요. 다 큰 어른에게 뭘 안다고 참견질이야.

 

고독사 중에서

 

사내는 늘 취해 있었다 허리보다

더 굽은 혀로 골목 담벼락이나 유리창에

새겨진 비문들을 해독하다 집에 돌아왔다

TV나 라디오를 켜면 순식간에

빈방이 인파로 가득 찼으나

오래지 않아 증발해 버리는

일시적인 체온을 그는 믿지 않았다

천국으로의 이삿짐 센터는 먼저

자신부터 참는 거다 라고

중얼거리며 그의 유일한 수행원인

그림자가 잠에 들면

그는 묵혀 둔 이야기를 꺼냈다

어두운 게 싫어 그림자란 그림자는

죄다 숨어 버려서 적막뿐이니까

내 글에는 그래서 밤이 없어

 

 

? 내 글엔 완전 어두운 얘기 다 쓰는데 시발같은 일 있음 시발이라고 쓰자는 주의라.

그리고 이미 고독사 각오하고 있다. 암 걸려도 절대 병원은 안 갈 거임. 솔직히 내가 혼자 죽든지 같이 죽든지 어차피 죽은 후면 끝인데 내가 어찌되던지 알 게 뭐야. 그냥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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