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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ociety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2

아는 사람의 집에 들르니 돈을 벌 수 있는 데가 있다며 한 군데를 소개해주었다. 가보니 술집이었다. 창녕에 갔다가 다시 부산 영도로 갔다. 1948년 무렵, 스물여덟 살 때 나는 부산 해운대로 가서 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가 되었다.

 

 

이래나 저래나 여성들 정말 고생이다.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서도 제대로 연애해서 결혼하신 분이 거의 없는 것 같더라. 어떤 남자를 좋아해도 그냥 같이 살기만 하거나, 아니면 아무 남자나 만나서 결혼하거나; 이 케이스가 가장 기구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위안부는 일본인에게 끌려갔다는 이미지가 그래도 있었지만, 양공주는 지금까지도 욕을 먹는 존재인 것 같던데.

 

이건 여담인데 친구 아버지가 친구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무렵 미군부대에서 한국인들과 미군사이에 벌어지는 트러블을 담당하는 일을 했었다 하는데 그 해 아버지 얼굴 단 1번도 못봤다고. 사건들이 하도 많아서 친구 아버지가 집에 오지를 못하셨던 것이다. 사건도 많고 마음고생도 엄청났다고 한다. 거친 미군들과 한국 여성 사이에 수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서...

 

그러나 위에 있는 건 특수한 경우고, 대부분은 파출부나 술집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하셨던 듯하다. 내가 6월에 저리 될지도 모름.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동안 실컷 먹고 즐겼으니. 밑바닥부터 다시 혼자서 올라가야지. 한두번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밖에 나가도 추근거리는 남자들 다 떨어지고 없으니 주변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네. 남자들 추근거리는 건 가끔 가다 참지 못할 정도로 짜증이 날 때가 있는데, 그나마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 안 하고 왜 저러고 사나 하는 말투는 나름 변명할 거리도 있고 참을만하다. (개인적 의견.) 일자리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으나, 확실히 나이들 때가 낫긴 하다. 위안부 할머니분들 중에서도 그런 말씀 하시는 분들 꽤 있는 걸 보니 착잡하다.

 

일본 분도 계신 게 독특했다. 이 경우엔 탈성매매 여성으로 봐야 하겠지만 아무튼 일본에서도 돈 없는 집안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간 케이스라 볼 수 있겠다. 위안부에 대해 증언하는 몇 안 되는 일본인 중 한 명이라 볼 수 있겠는데 작고하셔서 안타깝다. 참고로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일본은 패전 후 점령 미군 대상으로 위안부 운영한 기록도 있다고 한다. 그 때에는 몰락한 부잣집 고학력 여성들도 일부 참가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이 한동안 위안부 사실에 대해 말을 못 꺼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위안부라던가 '화냥ㄴ' 현상 때문에 이들을 최소한이나마 지원하면서 그나마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일단 일본이 조용한 건 피해자가 그런 얘길 하는 걸 수치스러워 하는 분위기니까(도리어 게이샤는 자랑스러워 하면서 저런 사회 분위기가 있는 걸 보면 웃기다고 할까.)라고 하지만, 솔직히 수치스러워하는 건 어떤 사회에서든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다 밝혀지고 위안부 여성들이 떳떳하게 TV 방송에 출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간호사로 일했다 주장하는 어떤 분은 결국 그 일로 인해 지원금을 주는 게 1년 지체되었다 하시더라. 결국 정치적 환경이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일리 대령을 가장 곤란하게 했던 것은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그는 본래 이들을 일본인으로 알고 있었으나,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찾아온 15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하고 보호를 요청하면서 이들이 조선인이라는 사실과 일본군의 이야기와는 달리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스마일리 대령은 때때로 자신의 집에서 부대원들과 저녁을 먹을 때 이 여성들이 방문하여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고 기억한다.

 

 

아니 이렇게 되면 강간 빼고 일본군이 한 거랑 별반 다를바 없지 않나;;; 여성들이야 빚을 무효화해주고 놓아주니 고마워서 그랬겠지만 이 분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준 건도 아닌 듯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극구 말렸어야지;

 

남북한은 '위안부' 피해를 당한 시점에서 하나의 나라였으므로 그 역사적, 사회적 피해의 조건이 같았을 뿐 아니라 피해자들이 남북 관계없이 동원되고 전후에 귀국했으니, 별도의 기소를 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도 않았다. 문제는 남북의 대화통로를 가로막은 장벽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동포들을 통해 준비를 진행시키자고 다짐했지만, 팩스 하나도 전달되지 못하는 분단의 현실을 절절하게 체험해야 했다. 그냥 어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법정 사흘 전에 도쿄에 도착하여 남북의 기소팀은 반가워 눈물을 흘렸지만, 더이상 진전이 안 되는 서로의 시각적 차이를 절감했다. '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혀......'를 반복하는 북쪽 팀에 젠더 시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정말 힘들었지만, 모두가 지혜를 모았다.

 


마지막에 뭔가 사적인 감정이 ㅋㅋ

 

2017년 7월에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 군함도에는 하시마에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조선인 '위안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 속 '말년'이는 만주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다가 일본의 하시마로 이송되어 다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엔딩 크레딧에는 말년이가 지냈던 곳을 '유곽', 말년이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을 '위안부'라고 표기했다. 그러나 일본 공창제하에서 조선인 여성은 성매매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법적 성매매 업소인 '유곽'이라기보다는 형식적 성매매가 묵인된 요리옥, 또는 특수음식점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고증도 제대로 안 한 것들이 역사영화라고 깝치지 않았음 좋겠다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