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m&Essay

공손한 손

효자 중에서

추석 전날, 환갑이 지난 맏형이 어머니께 드린다고 선물을 꺼낸다. 난데없는 바바리맨 인형, 잔뜩 옷깃을 세우고 검은 안경을 낀 바바리맨이 식구들 앞에 나타났다. 순간, 야! 하고 형님이 소리치니 으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바바리맨이 앞자락을 열어젖힌 채 심벌을 아래위로 흔들어댄다. 심벌은 거대하고 사실적이라, 며느리들은 민망하여 고개를 돌리고 팔순의 어머니는 눈물까지 닦으시며 웃으신다. 인형은 소리를 치면 반응을 하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바바리맨을 향해 영민아, 하고 소리를 친다.

 

 

 

서울에 자취하고 있던 시절의 꿈을 꾸었다.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질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이 알고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두 사람분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만큼 강인하지도 정에 매이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까지 기억한다는 건 미련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눈에 덮이고 추운 그 길들은 보인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일평생 잔상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나를 죽이고 싶어서, 나를 살리기 위해 만날 수 없다던 중2병 남자. 현실에선 뉴스에 살인사건이 뜰 때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옛날의 그. 그래도 꿈에서만은 좋게 나왔구만. 

 

요지는 꿈을 열라 요상하게 꿔서 무슨 세종 아니 태종이 정도전과 쎄쎄쎄 BL찍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본 지라 실연시를 읽으니 마음에 확 와닿고 기분이 묘해지더라는 이야기. 어쩐지 이 시집 읽고 싶더라니.. 서평이란 깜빡이를 봤어야 했는데 못 봐서 교통사고 났으니 이 마음은 술로 치료해야겠구만.

그런데 이 시 읽을 때 초반엔 묘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보다 왜 이렇게 여성과 폭력적으로 붙으려고 한다냐 전생에 엿이었나... 과거에 옛 여친과 힘겹게 보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려고 한다. 자기 행동에 좀 문제가 있던 게 아닐까? 물론 시인 자체가 아니라 시 속에 나오는 화자 이야기이다;; 그런데 60년대 초반생이신 어머니께서는 이 시를 굉장히 재미있어하셨다. (역시 아재 냄새가...) 어머니 말씀으로는 가족이 싸우고 나서, 상대방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부끄러움을 잘 표현한 것 같다고.

 

무늬

서산에서 과수원을 하던 넷째 형이
감전사고로 죽기 전,
속초에 살던 셋째 형은 이유 없이
며칠을 앓았다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에는
커다란 종이 있었는데
서촉의 동산에서 캐어낸
동으로 만들었다
어느날,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이 종이
숨죽여 울었다

그날, 서촉의 동산이 붕괴되었다
당신은 내가
한 달도 못 견딜 거라고 했다

 

무려 속초에서 살았는데 이유 없이 아플리가 없지 ㅋㅋㅋ 시인이 한 달도 못 견딘다는 건 과수원 농사인가 아님 속초살이인가.

'Poem&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산의 처녀  (0) 2018.12.07
사랑할 때와 죽을 때  (0) 2018.11.22
빈 배처럼 텅 비어  (0) 2018.08.27
어느 별의 지옥  (0) 2018.08.03
거물들의 춤  (0) 2018.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