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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4월아, 미안하다

하느님의 아이를 배지 않겠다구요

화분을 창밖으로 내어 놓아요.
아이 있던 자리가 젖고
아이 그늘 있던 자리가 젖고
빈자리에 빗방울들이
알을 슬어요.
하늘이 뿌리는 씨알.
흙 알갱이들이 간질간질 재채기할 때마다
화분 여기저기
씨알들이 튀어 올라요.

하늘이 씨를 뿌려요.
연못에 수련 씨를
텃밭에 장다리꽃씨를
길에는 빨노초 신호등 꽃씨를 뿌려요.
내 안의 유리창에
알을 슬려고 빗방울들이 안달이에요
으깨진 채 수만 개 알들이 굴러 떨어져요.
나는 하느님의 아이를 배지 않겠다구요.

 

 

 

 

이 시집에서는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머릿속에서 이런 스토리가 떠오른다. 시 속의 화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고 이름은 사월이였다. 그런데 뱃 속에서 유산되어버리고 실의에 잠긴 화자는 죽음과 삶에 대해 고민하며 긴 시를 쓰고 이 시집에 모든 미련과 고통을 묻어버린다.

 

 근데 실제로 이 시집 이후에 시인이 쓴 다른 시집에선 이 정도로 슬픈 섹드립이 담겨져 있지 않다. 사실 그래서 이 시집을 택한 것도 있다. 슬픈 일을 겪으신 건 유감스럽지만 이래야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독자들이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어제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끔 여성 비하발언을 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그 분과 같이 티비를 보다 다운증후군 같은 얼굴을 한 아이를 한 여성이 나온 것이다. 아마 그녀를 비난하려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이래서 여자가 술담배하면 안 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남자가 술담배해도 저렇게 되요."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그냥 넘어가도 될 이야기를 계속 트집잡고 열심히 싸웠다. 이 시집이 페미니즘 이야기는 아니지만, 시집에서 화자가 겪었을 온갖 고생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듯하다.

 

 

 

심언주 씨 시집을 볼 때 그리자이아의 과실 에피소드 중 이 분이 자꾸 떠오른다. 사카키 유미코라고 한다.

 

 대략 내가 본 애니메이션으로 살아온 내력을 읽어보자면, 일단 대기업의 딸이긴 한데 첩에게서 나온 자식이다. 아들을 낳으려고 의도했었던지라 첩에게 소홀하게 되었고 정실에게서 결국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아들도 병약해서 숨지고 유미코의 어머니도 몸이 허약하여 세상을 떠났다. 유미코는 어머니에게서 '네가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것을'이란 말을 들었고 커터칼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결국 그 커터칼로 자신을 험담하던 친구까지 해치게 되어 대기업에서 학교를 차려둔 뒤 세상과 단절시킨 것.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건 머리 상태의 변화다. 우리나라에서는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결혼하면 머리를 틀어올린다. 그러나 결혼의 주 목적이 '아이(아들) 낳기' 인지라 아이를 못 낳으면 석녀라고 놀림당하거나 버려진다. 버려진 여자는 다시 머리를 내린다. 부스스해진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기도 하지만. 혹은 현재 자유연애시대인 우리나라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 여자가 이미지 변신 혹은 자신이 잘 살고 있다는 어필을 위해 머리칼을 짧게 자를 때가 있다. 확실히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이 시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하는 그 모든 것이 여성의 상태에 따른 헤어스타일을 생각나게 한다. 가위라는 시가 대놓고 등장하기도 한다. 뭐 그 스토리의 결말까지 계속 이야기하자면 머리를 계속 길러 늘어뜨리던 그녀는 불꽃의 전학생(...)인 남자주인공을 만나며, 그와 맺어지는 유미코 애프터 스토리에서는 머리칼을 묶는다.

 

 

 

강원도가 싫다는 이야기인지 좋다는 이야기인지 알쏭달쏭하지만 일단 강원도에 대한 시가 쓰여져 있어서 올려본다. 

 

비명

누우면 하늘, 일어서면 산이 보이는 강원도.
저 산 좀 치워주세요.
저혼자부푸는산, 제풀에꺼지는산, 들어가도산, 나와도산. 강원도 해는 ㄱ산에서 뜨고 ㅎ산으로 져요.

안개로 빚어진 한계령으로 흘러가기 싫어요.
백당나무, 산사나무에 얹힌 알약같은 꽃 이파리들이 싫어요. 바람이 머리 위에 아스피린을 뿌려요. 눈동자는 짖는데 울지 못하는 새의 부리가 싫어요. 아무 때나 울어대는 풀벌레는 더 싫어요.
감자 꽃, 메밀꽃, 옥수수 꽃. 저 꽃들을 다 따 버리면 강원도의 허리가 무너질까요?
저 산들을 다 치우면 강원도 얼굴이 사라질까요?

가도 가도 숲에서 꺼내 주지 않더니 끝내는 바다 속으로 밀어 버리려구요?
싫어요. 제대로 죽이지도 죽지도 못하고 스르르 마취가 풀려 버리는 강원도 나비는 정말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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