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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Development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는 최근에 완전한 문맹인 제일한국인 할머니의 리포트를 읽었는데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시나 전후의 혼란 속에서 한국어도 일본어도 읽을 수 없는 상태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해외에 나갔을 때 이상한 감각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 그런데 그 할머니에게는 세계 어디에 가도 '이향'일 뿐입니다. (...) 자기가 사는 집 문에 페인트로 인종차별적인 낙서가 쓰여 있는데도 그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줘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아직 소녀였다고 하는데, 그날부터 도로 표지판이나 시내의 간판이 모두 자신을 차별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이는 정신적인 병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어릴 때는 신경질적인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고질라라고 놀림받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통통했는데 외양으로 놀림받았다. 20대 초반에 남친을 사귈 땐 있지도 않는 상상의 '커피 나르는 일만 하는 회사원 여성' 이야기를 줄곧 들어야 했다. 페미니스트 남성들에게 가정주부 하지 말고 직장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소리는 수없이 듣는다. 지금은 남자가 나를 밀쳐서 옆의 상자에 다리를 부딪쳤는데 내가 피하는 모습이 발레리나 같다고 추근대며 내 옆에서 발레리나 흉내를 줄창 냈다. 근처에 그의 여친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전부 별것도 아니란 사실을 안다.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광적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면, 대학을 가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페친이 있었을까? 직장동료들의 이지메가 이 정도로 끝났을까? 직장상사는 내가 고졸이었으면 내가 실수할 때마다 내 멱살을 들고 목을 졸랐을 거다. 정신병력이 없는 여자를 찾는 페친이 있다. 정신이 멀쩡한 여자? 존재할까? 이런 정신나간 사회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잘 수 있는, 정신이 멀쩡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요즘은 동성의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겠다. 불쌍해서. 그러고보면 여자들이 문맹에서 대부분 벗어난 게 언제인지 이 책에선 다루지 않는다. 책의 분량을 짧게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어쩌면 책을 읽는 여성이 너무나 최근에 많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못지 않게 미친 제목이 있었는데. 박원순이 썼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였나. 어디에 다리 잘라달라거나 자르라는 제목은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섹스와 공포라는 책까지 있으니 확실히 그런걸 진열하는 서점과 '주인장이 선택할 여지도 없는' 도서관은 사사키 아타루 말대로 중2병의 소굴일지도...

 서른살 먹은 요즘 와서 알게 된 게 있는데, 시나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은 내 주위에 한 명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 심지어 문학책을 읽은 수만큼 월급이 많은 경우도 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지만, 그래도 죽어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어라. 빚을 내서라도 판타지 소설을 시리즈째 사서 읽어라. 아무리 어릴 때부터 읽어도 시간이 없는 게 소설 읽기다. 그리고 무한 반복해서 읽는 소설책 한 권은 구해둬야 한다.
 맨날 블로그에서 책문답 올리는 걸 보고 '조회수 올리려고 그러시나봐요?'라고 하는 사람 자주 본다. 뭐래니? 내 인생 잘 되려고 올리는 거다. 담배는 물었는데 라이터 불이 안 켜져서 계속 땡기고 있는 거랑 똑같다. 제발 소설 좀 읽으세요. 뭐 여기 이 책에서는 문학의 의미를 좀 더 넓게 생각하지만.

 

 그러고보니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는 다 함께 죽거나 다 함께 사는 건 행복한데, 다 사는데 나만 죽거나 혹은 다 죽는데 나만 사는 건 슬프다고 했던가. 특히 맨 끝의 상황은 그게 사는 동안 지속되서 최악이라 했던가.
 주인공은 '세상이 다 망해도 이리야만 살면 돼' 라고 했고 그를 체포했던 군인 아저씨는 '세상의 끝에서 나는 네 손에 죽고 싶었다'라고 절규했었다. 그럼 세카이계는 종말이 아니라, 종말 이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인가. 뭐랄까 그러고보니 인류 멸종이 아니라 그건 단순히 대재앙이잖아.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을 소개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책을 보고 또 감동받았다. 페미니즘이란 양념을 참 적절하게 뿌렸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엔 독서모임에서 다루는 면역에 관하여를 읽는다. 그 다음엔 구별짓기 하를 읽고 염무웅의 자유의 역설을 빌리고 내여귀를 읽는다. 그러다보면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이 또 정해지겠지. 요즘은 이런 시간이 즐겁다. 정말로. 그리고 다행이다, 내가 책을 읽는 여성이라는 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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