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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Nuturition

순이

순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청소년소설
지은이 이경자 (사계절,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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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이 고향이라는 작가의 말에 문득 동질감과 경외심이 솟구쳐오르는 걸 느꼈다. 보통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비교적 얼마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을 배출한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도 그럴 것이 깊은 첩첩산골로 대표되는 그 고장은 역사를 유독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딱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본인도 고등학교 시절 단체로 소풍나갔을 때 '북쪽 여자아이들이 더 이쁘네 어쩌네' 속닥거리는 어른들을 많이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인터넷 시대가 활짝 열린 2000년도에. 휴전이라는 평화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원도는 피서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동네가 되버렸다. 그 고장 출신마저도 강원도 출신이라고 공공연히 드러내길 꺼리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휴전 특유의 긴장감때문에 오히려 더욱 강원도에 대해 알기를 꺼려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본인은 여자라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최전방에 나가본 군인이라면 내 말을 잘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고속도로를 따라 군사지역을 구분하는 철조망들이 쭈욱 늘어서 있고, 길거리는 휴가나온 군인들로 바글거린다. 제법 한적한 바다로 가다 운이 좋으면 포병대대의 사격훈련을 구경할 수도 있는 곳이다. 북한과의 전쟁은 우리나라의 상처이자, 일상이자, 우리나라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굳이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잠수함 사건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강원도는 전쟁의 긴장감과 아픔을 그대로 품고 있는 고장이다. 아니, 그 자체가 일상이기에 아픔도 없다. '순이'에 나온 어른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듯이 밥먹고 살기 급급한 사람들에게 전쟁은 그저 생계의 전환일 뿐이다. 순이의 할머니에게 전쟁은 그저 각자 남한군과 북한군으로 나눠진 아들들의 죽음뿐이다. 이 소설은 6. 25 전쟁의 옳고 그름을 멋대로 재보지 않는다. 그저 양양사투리처럼 덤덤하고 묵묵히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국사교과서엔 설명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신화이다. 눈 앞에 생생히 어른거리는 50년대의 삶 속에서 우리나라가 전쟁국가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이 책의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할머니-어머니-순이 순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했다는 점이다. 제사를 지낼 때 철이와 순이가 겪는 차별대우 장면은 우리나라 사대정신이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정신적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여실히 담아낸다.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까지 휘두르지만 사실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숨기려 할 뿐인 남성들. 그 욕설과 주먹과 발길질을 감당해내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내고 그 속에서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는 여성들.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한지 따지지 않는다. 누가 착하고 누가 불행한지 알 수 없다. 남성들은 이 책을 읽고서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을 것이다. 사대주의와 세대차이와 극단적으로 다른 의견 속에서 순이할머니와 순이어머니가 두 눈에 독기를 품고 싸우면서도 문득 서로를 보며 웃는 이유를 아마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으리라. 전세계의 사람들이 모르고, 남성들이 모르고, 심지어 우리나라 여성들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교감을 '순이'는 멋드러지게 표현했다.

 땅을 깊이 파면 천국이 나온다는 영이의 말에서 유독 가슴이 아팠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가르쳐준 사회의 존재에 대해서 명확히 시사하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결국 교회에 갔을 때 본능적으로 할머니를 보고 싶어한 순이의 예감은 적중하리라. 그러나 자신이 익힌 문자를 통해 어린시절 그토록 믿고 경외했던 천국과 미국이 자신을 배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 그녀는 아직 6살 철모르는 소녀이기에. 이 책을 보는 여성들은 소설 속에 자신의 소녀시절을 두고 오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설빔을 입은 순이의 모습을 담아낸 겉표지 의외에 어떤 일러스트도 실려있지 않다. 오직 문자에 의존한 채, 머릿속으로 강원도의 순박한 이미지를 끌어내야 하는, 그러나 가시처럼 군데군데 달려와 박히는 현실을 이해해야 하는, 어른들의 동화인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들춰보면서 아무리 갑갑하더라도 소설 속 순이는 행복하고 순수한 채로 두자. 우리는 순이와 달리 순수하지만은 않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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