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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ce

사랑하리, 사랑하라

승천

"사랑을 위해 죽는 여자를
당신에게 보여줄게요"
텔레비전 화면 안에서
절망한 한 여자가 즉시 죽었다
스스로 탄피를 부숴내고 폭발한
한 발의 탄환
그 여자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나에게
도전하고 승리했으며
내 안의 비겁자를 고발하여
재판도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고는
풋복숭아 빛깔의 소낙비를
잠시 퍼붓고
금빛으로 승천했다

 

 

 

개인적으로 김남조 시인을 참 좋아한다. 

 

 그녀는 희망과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들을 많이 지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에세이는 가부장제에 항의하는 듯하면서도 순응하는 빛이 보여 거부감이 갔었다. 버렸다가 다시 사서 집에 둔 건 기억나는데, 다시 버렸는지 집에 아직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그녀의 시화집을 다시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무엇보다 사랑시이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같이 있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다니는 그녀의 존재가 보인다.
 과거 그녀의 시 전집을 읽었을 때는 어지간히 내가 철도 없고 눈치도 없었나보다. 하긴 시집을 그닥 읽지 않았을 때니까.
유독 이별에 대한 시가 나오면 마음이 짠해서 감싸주고 싶네.
 하지만 최근에는 기업에 관한 시도 쓰고 어설프게 정치 쪽으로 가고 있어서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랑초서 쓸 때가 딱 전성기이셨던 듯.

 

 

 

짧은 시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 따지고보면 김남조의 시가 크게 기여했다. 사랑초서는 겉보기엔 길지만 토막토막을 살펴보면 굉장히 단순하다. 게다가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그녀는 사랑의 느낌을 잘 살리는 편이다. 이 시집에 실려있는 그림은 그러고보면 김남조의 시에 드러나있는 분위기를 잘 살렸다. 사랑의 추억이 배어 있는 장소로 가면 어느새 주변의 사람이 지워지고, 결국 나와 당신도 풍경 속에 녹아드는 법이다. 간단명료한,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분위기를 거리의 모습만으로 잘 표현해냈다.

  

 시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나 많지만, 한 마디만 하자면 김남조의 시는 거의 다 좋다. 언제 어디서 몇 번을 보더라도 시의 의미가 계속 바뀐다. 메시지는 단순한데, 계속 심장의 다른 부분을 적셔준다. 아무래도 그녀의 시에 드러나는 중요한 주제가 사랑이고, 시집을 읽는 독자의 경험이 바뀌면서 매번 성숙해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나는 성숙보단 의견의 달라짐에 비슷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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