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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Society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

왕은 자신의 서자인 이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궁에 들어와 있던 민씨가의 계집종(야사에도 나오는 효빈 김씨)이 태종의 아이를 가졌다. 이를 안 왕비 민씨, 이때는 왕에 대한 배신감으로 눈이 뒤집혀 있을 때였다. 옛 집으로 내보내 행랑방에 가두었고, 해산이 가까워지자 방앗간 옆에 두어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다. 때는 혹한의 12월, 아이를 낳자 이불도 없이 어느 오두막에 내팽개쳐졌다가 교하의 집으로 소에 태워 보내졌다.

 

 

그런데 민씨에 대해서도 공감이 가는데 이 사람은 엄청 배신감 느꼈을 것 같다.

 

이방원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그녀도 그러니 분명 둘이서는 어울리는 커플이었는데, 갑자기 왕이 되고서는 이런저런 다른 여자들을 엄청 건드리고 다니니(나중에 세종 전의 세자가 '아버지도 여자들 거느리고 다니는 주제에 왜 나는 안 된다 하는가?'라고 하는 걸 보면 단지 왕권을 세워 종친들을 경계하기 위한 작전은 아닌 것 같다. 왕족 집안이지만 그래도 가족 사이니 아버지의 여성 편력이 어떤지는 다 보고 살았겠지.) 시샘을 넘어 배신감이 나는 게 보통이겠지. 근데 이방원의 태도가 가관이다. 일단 민씨가 투기를 하니 궁 내 거처를 옮기겠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그렇게 해서 남자의 여성 편력보다는 여성의 투기를 더 추하게 보는 것이다. 박원순 때도 그렇지만, 가해자 남성의 옛날 공을 어떻게든 찾아 추켜세우고, 반면에 피해자 여성의 약점을 어떻게든 만들어내 헐뜯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방원이 그녀의 친척인 민씨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척살했으니 그녀도 조선이란 나라의 피해자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태종 이방원!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물리치고 오늘에 이른 그다. 아직 젊은, 서른세 살의 나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정치가다. 그동안 정국의 불안 요소였던 사병 문제도 세자 시절에 이미 정리했고 이에 반발했던 조영무 등도 이제는 완전히 꼬리를 내린 상황.

(...) 자주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등 성의를 보여도 얼어붙은 부왕 태조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를 않는다.

 

 

아버지와 자식의 다툼이라기보다는, 정치상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아서 생겨나는 다툼같기도 하다. 태종이 세종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식들도 쳐내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은근 인정을 따르는 태조같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겠지.

 

언제든지 눈물을 쏟아낼 수 있는 연기파 임금. 측근 신하들이야 눈물로도 충분했겠지만, 궁궐 밖 사나운 민심을 무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대소 신료들과 만백성이 아바마마의 귀경을 고대하고 있사옵니다. 염불하고 경을 외는 게 꼭 소요산이어야 하옵니까?"

"내가 왜 부처를 좋아하는지 아느냐? 두 아이와 사위 하나가 공중에서 내게 '저희는 이미 서방정토로 가고 있습니다.'하기 때문이다!"

 

 

저런 아버지와 자식 싸움까지 다 실록에 썼다니 놀랍다. 그런데 태조의 침착한 성격을 생각하면 저렇게 얘기한 것도 다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고; 저렇게 쎄게 얘기하는 걸 보면 그 아비에 그 자식이란 생각도 드는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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