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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뜻밖의 바닐라

다이버 중에서

 

바다는 바닥도 물의 입체도 아니었지. 다만 땅의 천장, 전구를 갈기 위해 길게 뻗은 손처럼 우리는 나란히 몸을 세우고 가장 어둡다는 빛을 찾으러 갔었다.

 

가득히 입을 벌려 아직 남은 대기와 키스해. 오직 키스로만 인간은 말을 잊는다. 말을 버리고 입속의 심해로 잠수해 들어가...... 그건 사람의 천장이거나 낮의 바닥. 지구가 껴입은 빛나는 외투의 안감.

(...)

이야기한 적 있지. 우리는 낯선 수면으로 떠올라. 그건 오래 길러온 몸속 바다를 뒤집어 서로에게 내어주는 일이었다고.

 

 

이 시 이후로도 계속 안감과 겉감을 뒤집어 바꾸어버리는 내용이 계속 나온다. 아무튼, 굉장히 인상적인 시였음은 확실하다. 초반부에 인상적인 시들이 상당히 몰려 있다는 느낌이다.

 

이 분이 나오는 팟캐스트를 들어봤다. 부모님 모두 출판계에서 유명하시다던데, 기억은 안 나지만 저자는 그 이야기를 피하며 자신만의 문학을 쓰겠다고 말했던 듯하다. 확실히 저자의 그 겸손한 마음만큼이나 빛이 배어나올 것 같은 따뜻한 시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벼운 시는 아니지만 말이다. 바닐라라고 해서 설마설마했는데 펨돔이란 시도 나온다 ㄷㄷ

 

밀가루의 맛이란 시는 또 왜 그렇게 기억에 남던지... 케이크 사실 남이 주면 먹지 일부러 안 사먹는 이유가, 전에 학교 앞 뚜레쥬르 알바 간 적 있음. 그런데 캐셔만 시킨다더니 대뜸 도너츠 튀겨봐라 시키는 거임. 나름 열심히 튀겼는데 다 타지 않았냐 구박하고. 결정적인 게 고객이 예약한 케이크 꺼내려다 구석이 조금 뭉개진 거임. 아니 그럴거면 케잌 넣다 빼내는 서랍을 좀 여백 넉넉한 걸로 사던가 아님 케잌을 작게 굽던가. 그걸 또 내 탓이라고 대놓고 구박하고. 직원들은 또 직원들대로 성격 더러워서 결국 사장에게 나랑 같이 못 있겠다 찔렀다고 함. 결국 1주일만에 그만뒀고 그 이후로도 빵집 자주 가긴 했지만, 요새는 그마저도 가지 않는다. 솔직히 편의점 빵 중에도 맛있는 거 많고. 어쩌다 케잌 보면 그 생각 나는데, 이전에도 나랑 비슷하게 당한 사람이 페북 담벼락에 글 쓴 걸 본 적 있다. 그것도 두 명이나. 그 인간인지 아님 다른 빵집에서도 그러는건지. 10년 후가 되었는데도 생생히 남는 걸 보니 아마 기억에서 평생 사라지지 못할 것 같다. 크리스마스 날이라고 쉬지 못하는 사람들 많을텐데 꾀병부리면서 일하시길. 나처럼 무식하게 일하다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 일 만들지 마시고.

 

딸기잼이 있던 찬장 중에서

 

발끝을 힘껏 들고 높은 곳을 더듬어 충분히 붉은 것들을 맛보았어. 입가를 온통 물들인 채 한 쌍의 유두가 된 기분으로.

 

언니, 우린 분명 교묘히 어긋난 한 사람일 거야. 딸기의 어수선한 초록 왕관을 쓰고 이불 속에서 첫 몽정을 말하던 아침. 땀구멍마다 질긴 씨를 하나씩 슬어놓으며 우리는 함부로 은밀해지고 조금씩 말랑해졌지. 반투명 젤리 속 일렁이는 둘만의 왕국에서.

 

나에게 여분의 계절이 있다면, 부리가 사라지려는 새처럼 서둘러 속된 말들을 속삭이고 썩기 직전의 가장 달콤한 노래를 언니에게 선물했을 텐데. 분홍만으로 이루어진 무지개를 뭉개고 죄의식의 묘한 기쁨으로 올빼미를 불러올 텐데.

 

 

GL이네? GL이여!

 

물 발자국 중에서

 

수많은 시곗바늘들이 몸속을 서성일 때

숨은 태어나는 악기

곧 사라지는 악기

 

종이 위 증발하기 직전의 잉크가 품은 수면처럼

출렁이는 직물을 입고 멀리로 솟구치는

무른 몸들이 있었지

 

마중도 배웅도 아닌 인사로

바라볼수록 멀어져가는 투명한 걸음들이 있었다

 

 

가난하다거나 아님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들을 볼 때 난 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분들은 평생 자신의 사고를 고치기가 어려운 듯하다. 관대함이 부족하달지, 성숙하지 못하달지... 근데 이런 부류의 타입이 보이는 이유는 내가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라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최근 들기 시작했다. 일단 이제 2년을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서 돈도 없고(...)

 

 

언젠가 페북에서 집에 너무 오래 있게 된 나머지 밖에 나가 사회생활하기 어렵다고 조언을 요청하는 글을 봤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등 차마 보기도 힘들고 역겨운 댓글이 쏟아진다. 아기 때, 그 말랑말랑한 다리로 얼마나 걷기가 어려울까. 그러나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걷는다. 그렇게 살았음 좋겠다. 오늘도 사소한 일로 울컥하다 시로 인해 묘한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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