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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니체처럼 1220401224

만화는 지식은 물론이고 예술적 회화 능력과 더불어, 천박하다 명명된 것을 예술로 승화하려는 작가의 의지(본능)가 있다.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데엔 꽤 용기가 필요한 것임은 틀림없다. 또한 남의 과거 이야기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국 남성들이 쓴 대부분의 문학책을 보면 왜 어머니가 비정해질 수밖에 없고 TV를 즐겨 보면서 점점 현실의 감정에 무뎌질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려 들지 않는 데 대해서 유감이다. 그리고 누이가 어린 걸 어필하려 했겠지만, 메이드래곤 캐릭터처럼 만일 어린 데 슴가가 나왔으면? (응?) 저자에겐 죄송하지만 표현의 빈곤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듯하다. 딱히 이 책을 욕하는 게 아니라,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내용의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길래 그냥 써봤다.

 

남에게 함부로 상처주는 말은 그냥 언어폭력아닌가 싶다. 왜 그런 언행이 일침, 독설이라며 추앙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날카로운 통찰력이 들어있어도 타인의 인격을 찌르는 말이라면 지양되어야 한다. 근데 소위 멘토라는 사람들이 던지는 누구누구에게 고함, 독설, 쎈말, 일침 등은 대부분 무례함을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 그래서 요샌 쇼펜하우어 대신 니체를 좋아하기로 했다고 할까. 그러나 이 철학자에게도 언제까지 배울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

 

나는 저자와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가르치는 교육 계열이라면 자신의 경험을 빗대 이야기할 경우 학생들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학문 계열로 가진 못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저자의 생각을 아주 솔직하게 열거한 그다운 책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패널을 한 명 세워 서술한 감정계단보다 한층 더 나은 것 같다. 언어는 편해 보였으나, 그의 의견을 제대로 다듬지 못한 것 같은 티가 났다. 포켓몬스터가 다시 등장하는 등 언뜻 내용은 감정계단과 비슷해보이지만, 그 책에서보다 설명이 조금 더 보강되고 심화되었다.

 

그리고 랑시에르가 어렵게 말하는 스타일인데... 내가 본 무지한 스승이란 스승과 제자의 지적 평등을 탐구한단 느낌이었다. 인용된 강원도교육청은 "진짜로 무지한 선생님"을 생각한 거 같은데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나도 강원도에서 공부했는데 솔직히 EBS가 대학 합격시켜줬고 학교서 기억나는 건 쉬는 시간에 야동보는(여고였음) 선생과 수업시간에 벨트 풀어서 교탁 친 선생밖에 없는데(...) 저자는 어떤지 모르겠어도 솔직히 강원도 안 내 주변에 교사라는 인간들 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 두 선생과 그닥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

 

얼마 전 유행한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제도와 체제에 수족이 묶인 수행적 존재들에게 야성의 불씨를 던졌기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쫄지마 씨바"

 

나꼼수의 대표 언표는 싸움의 목적보다는 싸움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저항하는 주체들에게 웃음은, 요긴한 무기다. 즐거운 사람이 세상도 바꿀 수 있다. 나꼼수 뿐 아니라 발랄한 저항의 다른 방식도 있었는데, 그들은 사회가 지배하는 감정을 발랄하게 전복했기에 싸움 후에 밀려드는 허무에 도전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이라 생각하는 건 나꼼수를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랄까. 나는 일단 조국 이전에 김어준 총수 책 4페이지 정도 읽은 뒤 항마력 딸려서 덮어버린 사람이라 ㅋ 그쪽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읽으시길 바란다.

 

미술관, 박물관, 영화관에 자주 갈 수 있다고, 우월한 삶이라 할 수는 없다. 가끔 먹는 와인이나, 간혹 살 수 있는 명품이 나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취향이 이 사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환각제일 수 있다. 취향이 계급의 지표라면, 우리의 취향은 편견의 자장 안에 포섭돼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자꾸 어머니가 해외로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하시는데 영 땡기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다. 최근에는 와인보다 어디서나 살 수 있는 씁쓸한 막걸리가 좋아서, 굳이 해외음식 먹으러 가기도 싫다고 할까. 어르신들이 막걸리가 좋다고 할 때 대체 왜 이런 게 좋다고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복잡한 이유들이 엉켜있는 듯하다.

 

기술의 확산은 민주주의의 가속에도 이바지했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페이스북에 실린 연대의 호소로 백만 인을 거리에 불렀고, 독재를 몰아냈다. 노동운동가 김진숙씨의 목숨을 건 투쟁은 트위터로 실시간 중계돼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고, 언론에 의해 조명 받았으며, 많은 노동자를 살려낼 수 있었다. 언젠가 빌게이츠가 말했다. "어떤 사람은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쇼핑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데 그 기계를 사용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의 발전(특히 사진과 영화)으로 예술이 종말 했다고 비탄하는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예술 형식의 출연이 그 기술 덕분에 가능하다는 비평을 세상에 발표했고, 그 말은 증명됐다.

 

 

난 빌게이츠를 싫어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게임 중독자를 더 양산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한편으로 매우 존경할 만한 일들을 많이 하는 건 사실이다. 특히 그의 아내는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정도로 페미니즘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노선을 택했다. 결국 스마트폰도 도구일 뿐, 인간이 그걸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선악이 판별된다.

 

매콤하고 달짝지근한 녀석은 사랑을 고백할 때 떨리는 심장과 흡사하여,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명성이 나 있다. 이름도 애매하다. 닭다리 살로 만들었는데 갈비라고 부른다. 갈비 없는 갈비다. 봄 없는 춘천과 닮았다.

 

 

그러고보니 내 친구가 나와 크게 싸우고 화해를 한답시고 간 곳이 닭갈비 맛집이었다. 오랜만에 땡긴다. 현재 목표로 하고 있는 시험이라도 끝나면 가 볼까. 그렇지만 춘천의 닭갈비 맛집들이라 소문난 곳은 워낙에 불친절해서 그냥 다른 곳의 닭갈비 맛집을 가볼까 생각중이다. 친구 말로는 그래도 춘천 중 통나무집은 아직 괜찮다는데 가격도 괜찮을지 흠..

 

다른 감각을 창안하거나 제 감각을 확장시키는 행위는 예술가들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함으로써 존재와 세계를 개선시킬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문제, 성적 소수자들의 합법화 문제, 농촌 어르신들의 살림살이 문제, 도시 빈민들의 가난 문제 등이 우리들의 감각 내부로 침투하면, 그들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신들의 몫을 배당받는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책에서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일러문은 다시 읽어보면 참... 애니는 포함 안 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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