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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Essay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나의 소원 중에서

 

어딘가로 흐르지 못하는 어둠이

갈매기의 어두운 눈처럼

꿈꾸는 화살표처럼

허공을 찌른다

누군가 고요히 피를 흘리겠지

 

메마름은 무엇인가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새벽의 질문은 잘못되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다 죽은 포도를 되살리고 있다

나중까지 아주 배가 고플 것만 같다

(...)

쪼글쪼글한 눈알을 씹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메마른 입술에서

근사한 포도 향기가 난다면 좋겠다

 




 


 

포도와 여우 설화를 요새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시대에 맞추면서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게 잘 표현해낸 듯하다. 해석이 상당히 새롭다. 인상에 깊이 박힐듯.


요즘 해석하기 어렵거나 해석할 필요가 없는 시들이 좋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재미가 있다고 본다.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심오하게 생각하여 시를 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물의 근원을 따지는 게 철학이라더니, 이런 시가 철학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특히 산유화는 팬티가 워낙 강렬한 인상이 남는 시라서 다른 시들과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비판받을 만한 점이라 보지만, 시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엔 효과적이다. 짤은 땡땡이가 아니라 분홍 팬티지만 어쨌든 분홍이니까.

 

내 죄가 나를 먹네 중에서

 

식장을 나와 걷는데 광화문 거리에 노란 리본이 물결쳤어요. 아이들이 멈춰 서서 종이 위에 배를 그렸어요. 영문도 모른 채 삐뚤빼뚤 글자를 따라 썼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추모 엽서를 매단 줄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어요. 리본도 바람도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 주먹이 있고 빗자루가 있고 혁대가 있고 한바가지 물이 있지요. 그게 몸을 향해 날아왔어요. 심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가방을 메고 뛰쳐나왔다가 도로 들어갔어요. (...) 이제 더이상 맞는 일은 없는데 주먹은 여기저기에 참 많습니다. 빈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내가 모른 척 방치한 것들입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난 3.1절에 일본을 가지 않는게 예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요한 점은 알고 있다. 우리나라 물건 좋다고 신토불이할 때가 아니라는 것. 정작 일본에게서 독립은 되었을지언정 자본주의 속에서 허덕이는 게 한국의 현재 모습 아닌가. 이런 이야기하면 국뽕 이야기를 들을까 조심스럽긴 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소녀상이 일본 예술가에 의해 모독당하지 않았는가. 통일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관심도 점차 식어가는 시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더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자본주의적으로 나아가거나 혹은 친일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까봐 심히 두려운 바이다. 물론 연휴를 틈타 뱃지 등 굿즈를 사는 행위는 상징 그 자체로는 중요하다. 하지만 3.1절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엔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렇지만 3.1절날 일본여행가는 게 왜 잘못된 건지 알려줘야지, 육두문자를 무작정 쓰는 게 애국행위는 아니라 생각한다.

 

이근화의 시는 참 한국의 정서를 많이 반영한 듯하다. 한국의 정치 이야기라거나, 미역국 같은 소소한 이야기가 그렇다. 그러나 다문화가족에 관한 수업을 들을 때 이주여성들에게 시어머님이 자꾸 츄라이 미역국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왠지 미역국이란 단어가 나오면 거부감부터 든다(...) 물론 여기서 미역과 소고기를 한 짐 들고 오신 분은 시어머님이 아닌 친정어머니이시지만. 가난할 때는 소고기가 들어있던 그 음식이 그렇게도 보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말이다. 다들 어느 정도는 잘 살고, 다른 건강에 좋은 음식이나 약들이 많다. 특히 이주여성들에게는 달리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시는 2017년에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된 꽤 최근의 시집이다. 세상의 변화 속에서 이 시도 이젠 옛말이 되어갈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내 마음은 피바다를 건넌다 중에서

 

내 마음은 피바다를 건넌다

그의 투명한 발뒤꿈치를 따라간다

아직 나의 것은 아니지

 

허기와 온기와 비의를 헤치고

같은 질문을 매번 다르게 하는 재주가 우리를 이끌고 있어서

우리의 바다가 알록달록 물든다

 

큰 배도 작은 배도 깃발도 바람도

나의 것은 아니지

그의 주머니는 언제나 불룩해서

아름답게 엉킨 그물 속에서 황금 가오리가 날고

갈매기의 매운 부리가 파도의 말을 배운다



 


 

여기서 에반게리온의 그 바다가 나왔군요 몰랐음 ㅎ. 오랜만에 바흐 생각나서 음악도 잘 들은 겸 올려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ydCKpBxdB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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