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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꿈, 틀

 

지인들의 근황으로 가득 찬 SNS를 보니 다들 삶을 즐기는 듯해 더욱 외로워질 찰나, 헤어진 후 친구를 끊었던 전 남친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그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 어찌어찌하여 내 타임라인에 뜬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더 이상 반응할 마음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겹겹이 쌓인 감정과 기억들 저 아래에 어느 작은 부분이 덜컹거렸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불행히도 내 전남친들 죄다 한남들이란 게 밝혀져서 이런 감정 없을 것 같기도 한데(...) 난 이런 일 행여나 생길까봐 전남친들 거의 차단해버리고 걔네들의 친구들도 다 연락 끊어버렸다. 보통 안 좋은 방식으로 헤어진 친구들과도 이런 식으로 함.

 

어릴 때부터 춤을 좋아했던 소이는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20대에 남자친구에게 차인 것도 자세히 말은 안 하지만, 연예인이란 이유로 그렇게 되었던 모양. 그녀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 결국 라즈베리필드라는, 인디계에서는 꽤 거물의 밴드를 탄생시킨다.

 

여성이긴 하나 여성답지 못하단 말을 많이 듣곤 하는 나에게 옛날부터 이런 귀엽고 벚꽃 날리는 듯한 감수성은 부러운 편이었다. 친구의 강력 추천으로 최강희 에세이를 보고, 이후로 예능인들이 쓴 에세이를 가끔가다 챙겨보는 편이다. 특히 스트레스가 많아 몸이 경직될 것 같은 때, 이렇게 말랑말랑한 책이 필요할 거라 생각된다. 아버지가 외교관이신 저자는 나름의 외로움과 슬픔을 가지고 있으나, 그걸 섣불리 털어놓지 않는 것도 또한 매력적이었다.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영화 얘기와(...) 저자가 종사하고 있는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랑과 관련된 그녀의 솔직한 얘기와 친구들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데 충분할 만큼 따뜻하다. 코로나 등으로 최근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잠시라도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

 

가끔가다 시처럼 쓴 것들이 나오는데 시라기보단 노래 가사같은 느낌이 든다. 직업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ㄷ 그 안에서까지도 음악 소개가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하나하나 찾아 들어가면서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3. 오픈 마이크

장례식장 한가운데에 한 사람이 올라설 수 있는 작은 단상을 준비해 그곳에 마이크를 세운다. 나와의 기억을 가진 이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상관없이 나를 기리도록 자유롭게 사용하게 한다. 음악인은 나를 떠올리는 노래를 해주거나 악기 연주를 원하는 만큼 해 주고 그림 그리는 친구는 그곳에서 나를 위한 그림을 그려 주면 좋겠다. 글 쓰는 이는 낭독을, 마술사는 마술을, 피디님과 감독님은 "소이 씨, 레디, 액션!"을 외쳐 주면 좋겠다.

 

 

내 장례식 땐 바니걸 의상을 입고 노래를..(응?)

 

원하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혹은 그 전에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순간 세상은 온갖 힘을 작동해 그것을 막아 낸다는 것도 깨달은 지 오래다. 예를 들어, 어릴 적 새 학기를 맞아 산 어여쁜 연필 한 묶음을 몽당연필이 되기 전에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도, 큰마음 먹고 운동하기 위해 끊은 수영 학원을 하필 당일 마법에 걸려 일주일 정도 못 가게 되는 상황도 우주의 이런 저항 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간혹 여력을 다해 이 원리에 맞서 싸운 끝에 내가 꿈꾸고 원했던 것을 얻는다 해도 그건 기적이라고 불리는 흔치 않은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주어져 있는 것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그게 내 노력 같다고 생각되어도.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 안 될 때까지 수련을 거듭해야지.

 

무엇보다 다른 남자 사람들보다 그를 조금 더 자주 만나게 되는 이유는 그의 유머 때문이었다. (...) 영화에서 보던 게이 베스트 프랜드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고 실제로 여자 친구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할 때 '게베프'라고 불렀다. 물론 그는 여자를 좋아했고 심지어 여자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아 적지 않은 연애 상담이 내 몫이곤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일본에서도 오래 친하게 지냈지만 다른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거나 혹은 직접 사귀어보지 않은 남자사람친구를 게이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성애자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잔인하단 생각이 들지만, 동성애자들에게도 실례되는 별명 아니었을까. 일부러 거리를 두고 싶었다면 좀 다른 호칭을 붙여도 되었을텐데;;

 

한참 동안 그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 문자가 도착했다. 이달의 결재 내역이라면서 월급의 절반이 되는 금액이 찍혀 있다. 아르바이트를 따로 시작해야 하나 한숨을 쉬며 버스에 올라탔다. 창에 머리를 기대고 고민하는데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오늘의 연예 뉴스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랑스러운 그녀가 올해의 CF 여왕이란다. 한 편당 받는 금액이 5억이라고. 디제이는 또 그녀의 열애 소식을 꺼내며 이야기한다.

"그 남자는 정말 행복하겠어요." 라고.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고 친구의 이야기라던데, 실례가 될진 모르겠으나 이 책에 나오는 스토리 중 가장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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