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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ery&Horror

내 생의 적들

그녀는 대답 대신 담배를 입에 문 채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넘겨 탁자 구석에 있던 고무줄로 동여맸습니다.
"난 이렇게 생각해요. 저들은 총을 들고 있고, 우리는 맨주먹이라고요. 애초부터 승부는 난 싸움이죠.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광장에서 맞붙었다고 생각해봐요. 어린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어른들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광장 말이에요. 지하에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맞붙어 있다가 불쑥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작가 이인휘 님을 페친으로 직접 만난 사정이 있다.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라는 시집을 리뷰한 일을 기억하는가? 팟캐스트에서 어떤 시인이 추천해준 책이라서 아무 생각없이 집어 읽고 시가 너무 좋아서 글을 썼다. 그랬더니 이인휘 소설가님께서 상당한 동요를 보이셨다. 문자는 차갑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가 느끼는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일생 공장에서 일만 하다가 어머니가 병들어 돌아가시고 자신도 암이 생겨 시 한 권만 남긴 채 죽은 그 시인의 생애를 느꼈고, 나아가 작가의 생애도 얼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원래는 옛날에 그가 처음 쓴 소설을 읽을 생각이었지만 왠지 도서관에서 책이 보이지 않아서 이 책을 집어 읽었다. 페이스북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특히 군대 이야기를 할 때 무지하게 타오른 것 같기도 하다 (...) 내 페친 중에 70%는 남자이긴 하지만 젊건 늙건 간에 모두들 군대에 대한 두려움과 군대에서 겪은 설움을 댓글로 한없이 늘어놓는 통에 내가 나중에 따로 '폭력은 군대에 있던 아니던 간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글을 올려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하기사 우리나라가 군대 사회란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반은 가상이지만 반은 실제 인물이라는 소설가의 댓글과 같이 이 책은 그가 살아온 삶과 많이 겹치는 데가 있다. 처음에 작가 소개란을 볼 땐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인휘.

1958년 서울 출생. 야학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명지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3학년까지 다녔지만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며 대학을 자퇴하고 군대로 피신한다. 제대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을 떠돌며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돌아와 공장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섰고, 운동 과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영진이 파업 도중에 분신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사업회를 만든다. 이후 구로 독산 지역에서 추모사업회를 통해 노동운동을 하면서 소설을 썼다.

 

 사실 반드시 불가능한 게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꿈을 이루려는 수단이 직업이라서 직업을 꿈꿀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선생님이 되어서 주도적으로 왕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뭐 이런 식의 꿈을 꾼다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강원도라는 낯선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겨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 않게 수배를 당할 것이고, 나로 인해 궁지에 몰린 자들이 또다시 나를 잡아챌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설사 나를 잡으러 온다 해도 나는 내 삶을 더 이상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피해 언제까지 내가 숨어 있어야 할지도 아득했습니다. 어쩌면 그건 또다시 내 삶을 내 스스로 회피하는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한 달 정도 있으면 잠잠해질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시골에서 내가 키웠던 꿈을 미뤄놓을 수 없었습니다. 돼지도 키우고, 소도 키워 선생님이 되고 싶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 꿈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꿈이 있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니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겠다 이런 마음가짐까지도 상관없다고 본다. 문제는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무 생각없이 돈 벌 수 있는데를 가고 싶다고 할 때이다. 직장을 얻기 위해서 뭔가 마구 외워대는 게 공부인지도 의문을 제기해야 될 판인데, 우리나라는 특히 남성들이 출세해서 권력으로 날 비웃는 인간들을 찍어버리자고 생각하는 심각한 케이스가 많아서 그 의견조차도 눌린다. 마치 돼지를 죽여버렸는데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하고 안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정말 선생님 되려 하거나 공무원 되려는 인간들 마음가짐부터 철저히 심리학적으로 테스트하지 않으면 이 이분법적인 사회를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당장 사립 어린이집이 늘어나면 어찌 될까 부모들이 걱정하는 이유는 근본으로 따지고 들어갈 때 선생님이 저질이라서가 아니라 저질들을 사전에 걸러내지 못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또한 그 시스템을 분석해보면 사방 도처에 폭력이 깔려있다. 힘들겠지만 폭력을 저지르는 계기가 되는 위부터 뜯어내야 희망이 있다. 그 위에는 가부장제에 찌든 아버지,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는 군인, 지독한 사장, 외면하는 선생님이 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에게 고문을 받는다면 난 더욱 한술 더 떠서 그들에게 협력하겠다고 싸바싸바거리다 한 대만 맞고 끝날 거 두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 난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해서.

 

 

 

오랜만에 데로드 앤 데블랑이라는 판타지 소설 생각난다.

 

 1권인가 2권에서 난데없이 주인공 여친 죽었을 때 펑펑 울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주인공을 욕했었다. 그쪽도 주인공인가 여친인가가 장애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목숨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하니 주인공도 거기서 삶을 끝낼 줄 알았는데 그 인간이 계속 살아있어서 미웠다고 해야 할까. 자살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너무 괴로워서 같이 죽는 줄 알았다. 정말 진지하게 그랬다. 근데 나같이 찝찝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았는지 마지막권에선 끝내 주인공을 죽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주인공도 생명 있는 사람인지라 좀 머쓱했다. 머리가 크니 작가의 존재가 인식되면서 '작가가 주인공을 너무 굴려먹네' 이런 생각도 들고..

 

 

 

살다보면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거나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보다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인연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다.

 

 죄와 벌에서 왠 지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무작정 술집을 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삶의 밑바닥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마르멜라도프를 만나고 그의 딸 소냐와 인연을 맺는다. 이인휘 소설가가 지은 소설 내 생의 적들에서는 상현이 야심한 밤에 학생회로 주인공을 무작정 끌고 가면서 시작된다. 그의 첫사랑 연희와의 만남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다. 낭만적이라기보다는 되려 여러모로 심신이 불편하고 불쾌했던 그 만남들이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주인공 김광훈의 삶을 바꾼다. 소설가의 일생을 잘 아는 사람들은 소설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소설이 맞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전광석화같은 그 스침이 세상을 바꾼다. 소설가는 원고지 360매를 일 주일 만에 썼다고 하는데, 그만큼 놀라운 가독성을 보이면서 재미도 있다. 형사가 등장하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무협을 읽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 강제 징집된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오는 길에 검은 자동차가 서 있을 때... ㅋㅋㅋ 그러나 스토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다.

 

 

1980년 6월25일, 화정동 보안대 지하실
-“고문실에 들어가 봐라, 부처도 개가 되지!”
이인희 친구의 소설 [내 생의 적들] p.142-
김준태

광주항쟁을 詩로 노래했다고
그들은 잠행하는 나를 추적했다
도망쳐 다니던 날이 23일째였던가
어린 두 아들녀석이 하도 보고 싶어서
주위를 살피며 전남대 앞 우리집으로
(그때 나는 전남고 교사, 셋방살이었다)
들어서자마자 5분도 안되어 그들은
나를 체포하여 검정차로 달렸다
그 지프차는 검은 커튼이 처져 있었다
▲김준태-“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그들-“서부경찰서(월산동)로...간다”
그러나 내가 끌려간 것은 화정동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들어가자마자 비명소리
어디서 듣던 스님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짜식, 중놈새끼가 염불은 하지 않고
...신도들을 선동해! 이놈 죽어봐!”
▲“시민들을 그렇게 죽이면 돼냐고 했지요
그게 선동이라면...부처님께서 하신거지요”
그들 군수사관은 똥 묻은 군홧발로 스님의
맨머리(그들은 ‘대갈통’이라고 말했다)를
짓이기듯이 차고, 누르고, 밟아대는 것이었다
스님은 정말 개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때 그 스님! 스님! 어디에 계신가요?!
세상이 풀린 후로 백방으로 찾으려 했으나
스님은 내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무등산과
하늘은 저리도 미치게 푸르러갈 뿐이었다.

※2017.4.21(聖금요일).
작가 이인휘의 글을 읽고 쓰다

 

 

 

어디 계십니까 스님.
 이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살아계십니까?
 아님 우리보다 먼저 극락세상으로 가셨습니까?
 시인 김준태 님이 소설가 이인휘 님이 연희를 찾듯이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둘이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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